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 (중)

백선엽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그의 공이 많으니 과가 있다 해서 이를 허물삼지 말자고 하는, 보수를 참칭하는 이들의 주장은 참으로 헛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설령 공이 있다고 해서, 그의 과가 묻혀지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그의 과오라는 것이 같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쫓아다니며 토벌하는 것이기에.

얼마 전 백선엽에 대해 블로그 이웃이며 페친인 이인님이 쓰셨던 글을 옮겨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어떤 분이 이런 참람한 댓글을 남겨 놓으셨더군요.

“백선엽 장군은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입니다. 백선엽 장군이 일제시대에 일본인으로 태어나 일본군 장교로 나라에 충성한 것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좌파들의 거짓 역사에 속지 마세요. 친일파는 존재한 적도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식의 역사 인식이 이 분에게 이런 글을 남기도록 했을까요? 이게 친일 부역 모리배들이 정부를 수립한 이후 자기들의 역사를 지우고 오히려 남아있던 애국지사들에게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고 그 오랜 세월동안 권력을 탄탄하게 다졌던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의 잔상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애국지사들을 탄압한 일제 부역 주구들을 비판하면 '좌파'라는, 이 낡았으면서도 우리에게 생경하지 않은 이 인식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것 때문에도 우리는 백선엽이란 인간의 모습을 더 들여다봐야 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위에 인용한 저런 인식을 가진 이들이 저 분 뿐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일제시대에,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만을 누리려 애국 지사들은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들까지 탄압, 고문, 살해한 이들이 영웅으로 추앙받아야 합니까?

이 부끄러움들을 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저는 벗님의 글을 계속 퍼 나를 것입니다. 시애틀에서…권종상 /

백선엽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중)
- 해바라기 인생의 뒤안길엔 성찰이나 진정성의 향기가 없었다-

성공(?)한 군인 백선엽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내 승승장구했고 높은 분들의 이쁨을 듬뿍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평안도 군벌이라는 인맥을 형성했고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는 우리 군대 내 뿌리 깊은 병폐를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김종필 이하 육사 8기들이 그 병폐를 지적하며 군사반란의 명분을 잡으려 들었겠습니까?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만주군관 학교와 일본 육사 출신들이 대거 우리 육군에서 핵심 주체로 자리 잡는 데 백씨는 그들의 든든한 대부 격의 역할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 혜택을 본 이가 바로 박정희지요.

숙군 시기 박정희의 구명 과정에서 마치 혼자서 박을 위해 애쓴 것처럼 서술하는 백씨의 주장들을 보면 역시나 탁월한 처세의 달인답다는 감탄마저 나옵니다. 일본군 소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참모총장 재직 시 육사 교장에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자 독립군 출신의 안춘생 장군을 발탁했던 이종찬 장군의 행적과는 너무도 대조됩니다.

백선엽이 고작 마흔 안팎의 매우 젊은 나이에 군에서 전역한 시기도 4.19혁명이 일어난 그해 5월 말이었던 걸 보면 그는 이승만 시대를 상징하는 구시대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 고향인 평안도에 그냥 남았다간 친일부역의 경력 때문에 온전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월남해서 군입대를 선택했던 것처럼 그는 언제나 변화하는 시대에서 생존본능과 감각이 돋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출세지향의, 지조 없으며, 눈치 백단의 인사가 우리 군대의 창군 주역이자 최초의 사성장군이었으니, 과연 우리 군이 이후 어떤 것을 모토로 삼고 무엇을 전범으로 삼게 되었을지 한번은 의문을 가져야 정상 아닐까요?

실정이 이런데도 백씨가 우리 군에서 선순환의 구실을 했을 거라고 보십니까? 그런 인사가 가장 높은 자리의 군 원로라는 사실 자체가 정말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헌정사에서 이승만이라는 한번 잘못 끼운 첫 단추가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 권력을 잉태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 군이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늘 정신적인 빈곤과 정통성이나 정체성의 혼돈을 내재하고 있는 이유가 저는 백씨로 상징되는 친일부역 황군이라는 더러운 뿌리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이제라도 제2의 창군과 독립군과 광복군의 전통을 계승하는 새로운 시민사회와 국가에 맞는 현대적인 군의 위상 정립이 시급합니다. 과연 이런 시대의 열망과 흐름에서 백선엽은 어디쯤 위치해야 맞을까요? 지금 같은 최고 예우를 받는 원로의 위치는 당연히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재평가 논의와 그의 치부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는 정의로움과 민족 정통성을 중시하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민주주의와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의 내부 동력이 지속하는 한,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며 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음에도, 백선엽의 해바라기 지향적 삶은 여전히 탄탄대로였습니다. 곧바로 외교관으로 변신해 주요국가의 대사를 역임했으니까요. 사실 이 과정도 얼마지 않아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게는 군내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백선엽을 견제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의 세월을 백선엽은 특유의 친화력과 박정희에 대해 적개심이 없음을 내보이며 돌파, 10년 만에 귀국해 교통부 장관을 시작으로 1980년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순간까지 알짜배기 국영기업의 사장직을 역임하며 시쳇말로 ‘꿀 빠는 세월’을 보냅니다. 물론 그와 비슷했던 입장이었던 정일권 만큼 총리나 국회의장 같은 엄청난 권세를 누리진 못했지만, 이후 약 40년간 군의 원로이자 창군의 주역이며 한국전쟁의 영웅으로까지 격상되면서 한때는 원수추대 논의가 나올 정도로 안온하고 행복하며 빛나는(?) 여생을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듯이 사람이 살다 보면 공이나 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지금 백선엽을 평가 절하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100년, 1세기나 되는 긴 시간을 살았음에도 이 인간의 내면에는 출세지향, 양지만을 찾아다니는 능란한 처세만 있을 뿐, 과에 대한 그 어떤 성찰이나 죄송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일본군 출신이지만, 해방이 되기 전부터 일제의 작위 세습을 거부하고 해방 후엔 3년간 초야에 묻혀서 자숙하는 삶을 살았으며 늘 친일부역의 집안 내력과 자신의 황군 경력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살았던 이종찬의 생애와 대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승만의 실정과 폭주가 지속되자, 미국은 ‘상비작전’이라는 이름하에 군부의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 과정에서 군의 정치개입을 가장 앞장서서 막아내 군에서 가장 신망이 높았던 이종찬 장군을 내세우려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소령과 이용문 장군이 가장 앞장서서 이종찬을 설득했지만, 이종찬 장군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보게, 우린 한때 왜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부끄러운 경력이 있는 몸들일세, 아무리 실정을 하고 있다고 한들 이 박사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흠결이 있는 우리가 쫓아내서 역사에 또 한 번 오명을 남기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겠나? ”

제가 지적하고 싶은 대목은 바로 이런 측면입니다.

백씨가 만주군에 자진 입문하고 간도 특설대애서 못된 짓을 한 것 자체도 문제지만 이후 그의 생애에서 그가 진지하게 이 치부와 추문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돌아봤느냐 하는 대목인데 그의 기나긴 백 년의 삶에서 그런 대목이 있기나 한 걸까요? 그는 긴 시간 내내 충분히 자기 입장을 보여줬질 않습니까? 그렇다면 평가는 객관적이어야죠.

지금까지 출간된 그 어떤 백선엽의 저서나 말이나 언론 인터뷰를 보더라도 자신의 인생의 치부가 되는 친일 부역 만주 특설대 활동 대목에 대한 미안함이나 진심 어린 성찰이나 반성은 없습니다. 늘 애써 축소해서 말하거나 회피하기 일쑤죠. 그러다 보니 한국전쟁 시 백야전사의 공비토벌 대목에서도 한 점 부끄럼이 없이 민간인을 보호했다고 힘주어 강조했지만, 그의 부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넘겨진 포로 중에는 상당수 지리산 거주 민간인들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긴 생애 동안 이러한 과오나 오류를 수정하거나 성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까요? 한 2백 년 사셨으면 가능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합니다. 하지만 속죄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를 회피하거나 외면하며 어설픈 변명과 무시로 일관하는 전형적인 삶이 바로 백선엽의 생애였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으로 큰 영광과 후광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휘하에서 헌신했던 부하들에게도 무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5천 개가 넘는 한국 전쟁시 무공훈장이 국방부에 주인을 못 찾아 그냥 쌓여 있는데도, 그 긴 생애 내내 이를 외면했을까요?

남북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게티스버그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버지니아 사단의 지휘관 조지 피켓 장군은 전후 남은 생애 내내 그 싸움에서 전사한 부하들의 미망인과 자식과 부모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개숙여 사죄와 위로를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무모한 명령을 내렸던 총사령관 리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태평양전쟁의 영웅인 니미츠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알링턴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한 수병과 해병들이 가장 많은 샌프란시스코 인근 골든게이트 국립묘지에 부하들과 함께 하기를 유언했습니다.

이쯤에서 묻습니다. 평생 양지를 지향하며 해바라기의 삶을 살았던 백선엽의 인생에서 과연 자라나는 미래의 우리 아이들에게 뭘 보고 배워야 하는 게 있는 걸까요?

진심 민망합니다. 이런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지막 하편에서는 미국이 백선엽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사랑하는 진짜 이유를 톺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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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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