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 이야기, 80년대 초반 안도현 장정일 박기영 등과「국시」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장석주 시인이 경영하던 출판사 청하에서 낸「국시」동인지 2집이다.  1985년 7월에 나온 이 책자는 시인다방 시절 불이나는 바람에 소실되어 내겐 남은 책이 없었는데 얼마 전 문단선배 오두섭 시인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책을 보내주었다 .
장석주 시인이 경영하던 출판사 청하에서 낸「국시」동인지 2집이다. 1985년 7월에 나온 이 책자는 시인다방 시절 불이나는 바람에 소실되어 내겐 남은 책이 없었는데 얼마 전 문단선배 오두섭 시인이 보관하고 있던 귀한 책을 보내주었다 .

[뉴스프리존, 대구=박상봉 기자] 나는 「국시」 동인지를 통해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그 전에는 월간 「시문학」이 주관하는 전국대학생문예공모에 당선돼 초회 추천 자격을 덤으로 받은 것이 고작이다.

문단 원로급이었던 「시문학」 주간이 곧바로 추천완료 자격으로 시를 발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연락해왔는데 신춘문예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신춘문예는 해마다 최종심에 올랐으나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공주사대가 주관한 제2회 사대신문문학상에 당선된 적이 있다. 심사를 맡은 박재삼 선생님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한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신춘문예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자만에 빠졌었다.

1981년에는 대구 동성로 런던제과점 옆골목 탈다방에서 김용락 박기영 오승건 이문재 장정일 권승하 등과 「7인시화전」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박기영 시인이 「국시」 동인활동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나와 박기영은 안도현 권태현을 끌어들여 그해 5월에 「국시」 동인을 결성하고 통신문학동인지라는 독특한 방식의 매체를 발행하며, 시의 생활화 운동을 펼쳤다. 나중에 장정일 김상윤이 가세하고 강남옥 김완준 백창수 엄승화 시인을 동인으로 추가 영입했다.

매달 정기적으로 발행된 통신문학지 「국시」는 전국의 시인들과 문학동호인들에게 발송됐다. 기성과 신인 구별없이 우수한 신작시를 수록해 문예지가 부족했던 당시에 기성 시인과 신인을 막론하고 발표지면을 제공하는 시전문 매체로 한몫을 하였으며, 통신으로 독자를 찾아가는 새로운 시운동으로 주목도 받았다.

몇사람이 뜻을 모아 책자 형태의 동인지를 펴내는 것이 당시 동인활동의 주류였는데 편집동인 형태로 운영하면서 지면을 여러 시인들에게 할애하고 팜플렛 판형으로 만들어서 우편으로 발송 배포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신선한 편집방식이었다. 

시의 생활화 운동을 펼치며 4×6배판 20쪽 분량의 팜플렛형「국시」동인지는 옵셑 인쇄판으로 깔끔하고 디자인도 돋보였다. 동인들의 회비와 독자들에게 1부당 3백원의 우편료를 받아 제작 발송됐다.
시의 생활화 운동을 펼치며 4×6배판 20쪽 분량의 팜플렛형「국시」동인지는 옵셑 인쇄판으로 깔끔하고 디자인도 돋보였다. 동인들의 회비와 독자들에게 1부당 3백원의 우편료를 받아 제작 발송됐다.

5집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의 생활화 운동을 펴게됐는데 4×6배판 20쪽 분량의 팜플렛형「국시」동인지는 옵셑 인쇄판으로 깔끔하고 디자인도 돋보였다. 동인들의 회비와 독자들에게 1부당 3백원의 우편료를 받아 제작 발송됐다.

'시가 늘 우리 곁에 있게 하겠다'는 취지를 살려 통신문학지를 표방한 것인데 각 지역을 순회하며 가진 시낭송회와 독자와의 만남 등 다양한 시의 생활화 메시지는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팜플렛을 발행하며 시의 생활화 메시지를 전국에 퍼뜨린「국시」동인들의 새롭고 아이디어가 빼어난 문학활동을 집중 보도한 국내의 한 언론사 기사 내용.
팜플렛을 발행하며 시의 생활화 메시지를 전국에 퍼뜨린「국시」동인들의 새롭고 아이디어가 빼어난 문학활동을 집중 보도한 국내의 한 언론사 기사 내용.

「국시」의 영향으로 한때 대구에 통신문학지가 유행하기도 했다.「오늘의시」 동인이 펴낸 「님편지」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엽서 형태의 통신매체도 있었고 「국시」를 거의 본떠 만든 유사매체도 생겨났다. 

매달 「국시」동인지가 발행되고 거의 매달 신작발표도 하게 되었으니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10년간의 그 무렵이 내게는 물불 안가리고 치기 넘치게 작품을 쏟아내고 가장 왕성하게 시를 발표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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