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작 '햄버거의 명상' 작가 장정일의 스승, 괴짜 시인 우리들의 박기영 군!

1977년 12월 20일 대구 시내 고려백화점 화랑에서 59문학회 창립 시화전을 가졌다. 시화전에는 강남옥, 김경호, 김정학, 김정희, 나문석, 서유장, 박기영, 박상봉, 손태도, 윤상수, 이상수 등이 참여했다. 앞줄 왼쪽이 박기영 시인이고 뒷줄 가운데가 필자다. / ⓒ 박상봉
1977년 12월 20일 대구 시내 고려백화점 화랑에서 59문학회 창립 시화전을 가졌다. 시화전에는 강남옥, 김경호, 김정학, 김정희, 나문석, 서유장, 박기영, 박상봉, 손태도, 윤상수, 이상수 등이 참여했다. 앞줄 왼쪽이 박기영 시인이고 뒷줄 가운데가 필자다. /ⓒ박상봉

극적인 사건이나 충격적인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뜻하지 않은 손님처럼 들이닥친다. 막상 그런 일에 맞닥뜨리게 되면 사람들은 예고 없이 부딪쳐오는 그것에 대해 고무공처럼 반응한다. 어떻게 보면 하찮고 쓸데없는 일도 갑작스럽게 일어나면 당황하게 되고 큰일이라도 난 듯 수선을 떨기 마련이다.

누구든 전보(電報)를 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전보요!’ 하는 우편배달부의 외침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당황한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두 번 쯤 있을 것이다. 전보는 결혼이나 회갑 등에 대한 축하전문으로 띄우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모친 위독 급래요’아니면 ‘○○○ 부친상’등 놀랍고 반갑지 않은 전문이 위주여서 내용을 읽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걱정부터 앞섰던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심리를 유희로 즐기던 괴짜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장정일 시인의 스승으로 알려진 박기영. 장정일 시인이 「삼중당 문고」라는 작품에서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라고 쓴 그 시에 나오는 시인 박기영이다.

그는 긴급한 일이 있을 때나 이용하는 전보를 시도 때도 없이 아무한테나 보내서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괴짜였다. 1970년대 말, 부산 살던 시절 이야기인데 한번은 무슨 일인지 모르나 ‘○○○ 급래’라고 적힌 전보를 받고는 밤 열차를 타고 대구로 부랴부랴 달려온 적이 있다.

틀림없이 사고를 당하거나 골치 아픈 어떤 사건을 저지른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하던 일마저 팽개치고 허겁 대며 달려왔는데,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져 물어보았더니 그저 싱글벙글 웃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기왕 왔는데, 술 한 잔 사라!’ 어떤 궁색한 변명도 하지 않고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폼이 속을 확 뒤집어 놓았다.

그를 아는 동료시인이나 친구들은 괴짜스런 그의 행위가 주는 불쾌감과 즐거움-놀라서 경황없이 허둥대다가 하찮은 일임을 확인하는 순간, 참으로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 아니었든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한때는 문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괴짜시인. 박기영 군. 민음사에서 『숨은 사내』라는 제목으로 첫 시집을 내고 나서는 갑자기 문단에서 사라졌다.

필자와 만나기로 한 어느 날 대구 염매시장 곡주사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박기영 시인. 겉보기엔 다소 거칠게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씨 하나는 비단결만큼이나 부드러운 사내 중의 사내다. / ⓒ 박상봉
필자와 만나기로 한 어느 날 대구 염매시장 곡주사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박기영 시인. 겉보기엔 다소 거칠게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씨 하나는 비단결만큼이나 부드러운 사내 중의 사내다. /ⓒ박상봉

지금은 환갑을 넘긴 나이가 되었으니 ‘군’이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를 그렇게 부르고 싶다. 우리들의 박기영 군!

그를 아는 사람은 생김새만큼이나 기이한 그의 행적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있다. 눈은 부리부리한 올빼미 눈 같고 코는 메부리 형에 귀밑부터 턱 끝까지 산 도둑놈 같이 구레나룻이 선명한 노숙자 같은 분위기와 자유분방한 행동, 거침없는 떠벌임.

어떤 사람은 지저분하고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피하거나, 너무 거칠다고 두려워하는 이도 있지만 겉보기엔 그래도 마음씨 하나는 비단결만큼이나 부드러운 사내다.

나는 그를 고등학교 시절에 대구 중앙로 YMCA 복도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트게 됐는데 ‘학교에서 배울 것이 없어 중퇴했다’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퍽이나 의외로운 친구로 받아들인 기억이 난다.

그의 억지에 끌려 58년 개띠생이면서도 ‘59문학회’에 가입하게 됐고, 그의 이끌림을 따라 이문재, 안재찬(류시화), 하재봉, 김영승, 이중기, 정일근, 백학기, 이산하 등등 전국의 이름난 시인묵객들을 문청시절부터 만나 교류하는 행운도 누렸다. 그를 따라 안도현 장정일 시인과  『국시』동인을 결성하여 문단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본격적인 작품발표도 시작했다.

필자와 만나기로 한 어느 날 대구 염매시장 곡주사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박기영 시인.   겉보기엔  다소 거칠게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씨 하나는 비단결만큼이나 부드러운 사내 중의 사내다.
충북 옥천 금강 강촌마을로 숨어들어 '옻문화 전도사'로 살고 있는 옻사나이. 우리들의 박기영 군. 무명의 장정일을 시인으로 만든 스승으로 알려진 장본인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화가가 꿈이었던 우리들의 박기영 군이 물감과 캔버스를 버리고 문학에 입문하여 매일신춘문예로 등단하기까지 이른바 문청시절을 그와 나는 중앙파출소 옆 「심지다방」에서 주로 시간을 떼우며 보냈다. 당시 대입 재수생이었던 나는 지겨운 학원에서 자주 뺑소니쳐 심지다방으로 가서 그와 함께 노닥거렸다. 우리는 곧잘 토론했다. 그때는 문단 이야기와 어느 잡지에 발표한 누구의 시에 대한 강평을 나누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집에서는 아예 내어놓은 자식으로 취급당했던 우리는 심지다방이 집보다 더 따뜻한 보금자리였고, 우리가 토론하는 문학 혹은 시는 상처 입은 청춘을 보듬어주는 최고의 처방인 동시에 입시 보다 더 확실하게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희망봉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심지다방에조차도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심할 경우에는 욕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생각해보라, 커피 한잔 시켜놓고 종일 뭉기적거리며 똥폼이나 잡는 까까머리 청년들의 철없는 작태가 얼마나 꼴사납고 가련해 보였겠는지. 그나마 찻값이 없는 날도 있어서 엽차만 축내고 나오는 날은 틀림없이 머리뒷꼭지에 한 바가지 욕을 뒤집어썼다.

나중에 「시인다방」을 운영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덕분이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줄곧 ‘박기영 군처럼 가난한 시인들이 차 값이 없어서 쫓겨나는 일이 없도록 시인들을 위한 다방’을 구상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보잘 것 없는 자본금으로 경험도 없이 과감하게 다방을 차리는 모험을 시도하였다. 「시인다방」은 문학의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암울했던 그 시절 한때나마 대구지역 문학청년들과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냈던 곳이다.

박기영 군이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옥중 당선된 기막힌 일화는 지금도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실 박기영 군의 필체는 본인도 알아먹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악필 중의 악필이었다. 예심을 보던 심사위원들이 읽지도 않고 멀찍이 던져놓은 것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신문사 선배가 발견하고 다시 정서를 해서 예심을 통과시켰다.

어쩌면 쓰레기통으로 곧장 들어갈 뻔한 작품이 우여곡절 끝에 본심까지 올라가 어렵게 당선되었는데 당선 통지를 받아야할 본인은 정작 연락이 닿지 않았다. 박기영 군은 당시 대구 50사단에서 군복무 중이었는데 문우 손태도가 신춘문예 당선통지서를 들고 면회를 갔더니 무슨 사고를 쳐서 영창에 가 있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위력은 군대에서도 통해 중대장의 특별한 배려로 그는 곧바로 영창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박기영 군은 언제나 극적인 사건의 주인공이었고, 가는 곳마다 충격적인 일을 벌였다. 일을 벌이는 것은 잘했지만 뒷수습은 언제나 내 차지로 남아 당황스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또 내 궁핍한 주머니를 심심찮게 털어갔다. 그가 먹은 밥값과 술값은 늘 내 차지가 되었고, 「시인다방」단골손님이었을 때도 하루 종일 바둑만 두면서 개개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커피 값은 달아놓고 돈까지 뜯어가기 일쑤였다.

과거지사를 죄다 따져본다면 나는 아마 박기영 군을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장본인으로 손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밥과 술을 얻어먹은 적도 있다. 오랜만에 한턱 쏘겠다고 해서 따라가면 신춘문예 시상식장이거나 어느 시인의 출판기념회 장소였지만 어쨌든 그의 덕에 공짜 밥과 술을 먹은 것은 사실이다.

그로 인해 어떤 피해(피해라고 해봤자 대부분 경미하고 장난끼로 빚어진 작은 사건이었지만...)를 당하고 나서는 ‘때리 쥑이고 싶도록’ 미운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당황스럽고 곤란했던 기억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가라앉고 좌충우돌했던 일이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다시 박기영 군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어느 날엔 그를 생각하며 시도 한편 썼다.

사람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그 일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몰라 수풀 속을 기어간 뱀의 흔적처럼 소문 한 장 남김없이 떠난 사람 잊지 않고 가끔 생각한다는 그 일

창틀에 턱을 괴고 앉아 살아온 세월만큼 야위어진 갈매나무 가지를 바라보는 동안 나뭇잎 뒷면에 숨어 있다가 불쑥 얼굴 내밀 것 같은 노란색 꽃잎 같은 사람, 나 여기 있어 키득키득 농을 건네며 다가와 손잡아 줄 것 같은 기대에 가슴 설레는 그 일

낮달이 꼬리를 감추며 서산마루 넘어 갈 때 유리창 두들기던 바람 눈물 몇 방울 손등에 떨궈오면 다시 추억의 긴 그림자 끌고 길을 나설지도 몰라

집 앞 골목 어디쯤 곰팡내 나는 고서점 구석진 자리, 바바리코트 짧은 깃에 목을 파묻고 먼지만 남은 책들을 뒤적이고 있을 구겨진 그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몰라

-- 졸시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 일」 전문

오래 박기영 군과 만나지 못하고 그리운 마음만 간직하고 살다가 어느 날 우연하게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그가 옥천에서 ‘옻샘마을영농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됐다. 지역농가 수익을 확대하고 옻식품과 옻을 활용한 의약품을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내는데 한몫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참 신기하기도 한 일이었다. 그 괴짜시인이 문단활동을 접고 소식도 없이 은둔해 있더니 옻전문가로 변신해서 또다시 세상 한 자락을 붙들고 떠들썩거리고 있다니... 지역의 옻 전문가와 민간 연구자들을 모아놓고 '옥천 옻'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우렁우렁 들리는 듯하다.

충북 옥천 금강 강촌마을로 숨어들어 '옻문화 전도사'로 살고 있는 옻사나이. 우리들의 박기영 군. 그에 대한 근황과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고 싶다면 영남일보 2013년 2월 22일자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제1호 인물로 소개된 아래의 신문 기사를 클릭해 보시기 바란다.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1」시인 박기영편-옻닭집 아들, 시인되더니 다시 옻사나이로 돌아오다

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