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6일 오전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문화예술 한바탕'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지금까지는 부패세력에 맞서 피해세력이 앞장선다든가, 자각된 지식인이 앞장선 사례는 있었지만 문화예술인들이 앞장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걸 강조하고 싶다. 문화예술인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그런 자들을 우리말로 '새뚝이'라고 한다. 썩은 늪은 침묵까지 삼킨다. 썩은 늪엔 가지를 말아야 한다. 그런 썩은 늪을 깨는 건 퐁당 떨어지는 솔방울 하나다. 그게 현상타파고 혁명적 전환의 계기인데 그 솔방울 역할을 하는 것이 새뚝이다. 새뚝이는 문화예술인이다. 이번에 문화예술인들이 나서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 (백기완 소장)

31년만에 마주한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백기완선생은 이 시대 가장 존경 받아야 마땅한 행동하는 양심가이다. 처음 선생을 본 것은 1986~7년 학생들의 집회에서 대중 연설하는 모습이었다. 선생의 연설은 특유의 산발머리를 쓸어넘겨가며 피를 토하듯 간절한 외침이었다. 31년전이나 지금이나 헤어스타일이 크게 다르지 않고, 머리색갈도 그대로이다. 아직 정정하신 모습을 뵈니 반갑다.

지난 14일 오후 7시 청계광장 소라탑 앞에서 열리는 '문화예술 한바탕' 행사를 앞두고 6일 오전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자리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박재동 화백, 송경동 시인 등이 참석해 적폐청산을 주제로 한 '한바탕'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14일 열리는 '문화예술 한바탕' 행사는 문화예술인들이 사회의 부패 청산을 위해 썩은 뿌리를 뒤엎자는 취지로 마련된 자리다. 사회에 김미화, 여는 말씀에 백기완 박재동, 노래에 전인권 이은미 박준 이소선합창단, 시 낭송에 고은 송경동, 연극에 극단 고래가 참여해 무대를 꾸민다. 영상에는 정지영 백승우 우광훈이 참여하고 무대그림에는 임옥상이 힘을 보탠다. 대동미술판:붓움직거림에 김성장 류연복, 문자도에 윤여걸이 참여했다,.

우리가 알아야 백기완,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 백기완 선생

‘임을 위한 행진곡’은 두 남녀의 영혼 결혼을 기리는 노래다. 신랑은 1980년 5.18 광주항쟁에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전사한 윤상원 열사, 신부는 1979년 12월 공장 옆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박기순 열사다. 두 열사는 1978년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講學)’-당시 들불야학 교사를 일컬음-출신으로, ‘들불7열사’에 속한다.

“죽음을 직시한 그 빛나는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였던 박형선의 누이동생 박기순 열사는 전남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1976년 입학했으나, 시국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했다. 1978년에는 여대생 최초로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외쳤으며, ‘들불야학’의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들불’이라는 이름은 유현종의 『들불』을 읽고 감동한 그녀가 ‘들불처럼 번져간 동학혁명의 뜻을 기리자’고 제안해 붙여진 것이다.

이들을 ‘영혼 결혼식’으로 묶은 것은 소설가 황석영씨. 황씨는 1981년 여름 광주항쟁을 전국에 알릴 목적으로 문화선동대 ‘일과 놀이’를 조직하고, 그 아래 ‘자유광주의 소리’팀을 구성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을 주제로 한 소리극 ‘넋풀이’를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하여 전국에 보급한 것이었다. ‘넋풀이’의 녹음은 광주 운암동 산중턱에 있는 황씨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보안상 녹음실을 사용할 수도 없어서, 술 먹고 친구들끼리 떠들썩하게 노는 척 하면서 녹음을 했지. 보통 일제 녹음기에 마이크를 꽂고 녹음한 게 원본 테이프야. 거기에는 우리 이웃집 개가 짖는 소리, 열차의 경적 소리까지 들어 있어.”

넋풀이의 마무리를 장식한 곡이 지금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사는 황석영씨가, 작곡은 1980년 ‘영랑과 강진’으로 제1회 대학가요제 은상을 차지했던 김종률씨(현 소니 BMG 뮤직 대표이사)가 맡았다.

“녹음날 전에 종률이가 기타로 멜로디를 들려줄 때, 떠오른 것이 백 소장은 고문 후유증을 겪으면서 썼다는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 ‘산자여 따르라!’였어.” 원제목인 ‘산자여 따르라’는 83년 실제로 치러진 ‘영혼 결혼식’의 동참자들에 의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변경된다.

원곡의 가사는 지금 알려진 것과 조금씩 다르다. 원곡의 가사는 영혼으로 승화한 열사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목놓아 부르짖는 내용이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우리’들이 주체가 되어 외치는 노래로 개사되었다. 곡 중에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원래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였으며,‘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는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였다. 죽은 이들의 외침이 살아남은 자의 다짐으로 승화한 것이다.

비지땀 어린 노동요에서 굳센 결의를 엮은 저항가, 절절한 사연을 담은 연가까지. 우리 민족은 노래를 지난한 삶의 탈출구로 삼아 그 안에 모든 감정을 털어왔다. 그 때문인지 노랫가락은 굽이진 우리네 삶의 곡절과 그 모습이 닮아있다.

백 소장은 평생 재야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펼쳐왔다. 그가 공연에서 부를 10곡의 노래에는 도시빈민운동과 반유신운동 등을 주도해온 투사로서의 삶이 녹아있다. 이번 무대는 급변하는 현대사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민중들의 곁을 지켜온 그의 한평생 그 자체다. 또 여기에는 백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 합창단이 함께 해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울음을 노래에 담아 공연에 힘을 더한다. 동희오토, 기륭전자 사태 등 노동 문제 현장의 최전방에서 싸워온 이들의 애끓는 선율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견뎌야 했던 아픔이 깊이 배어 있다.

이렇듯 현실에서 직접 겪은 날 것의 슬픔을 담아냈기 때문일까. 백 소장은 공연 레퍼토리에 실은 곡들을 유행가의 순우리말인 ‘날노래’라 칭한다. 그는 자신이 날노래를 즐겨 부르는 의미에 대해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날노래가 내 의식을 키웠다”며 “날노래는 그 시대 사람들의 한을 담은 역사의 보고이자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불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처럼 이번 공연에서 부를 날노래인 ‘울고 넘는 박달재(박재홍, 1948)’, ‘녹슬은 기찻길(나훈아, 1972)’ 등에는 우리 민족 일상의 삶과 감성이 투영돼 있다.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 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절절한 사연이 담긴 ‘울고 넘는 박달재’의 구성진 가락은 밥 한 덩이 지을 쌀도 없이 가난 속에 고통 받던 민중의 서글픈 심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허리춤에서 덜컹거리다 결국 전부 으스러져 볼품없어질 도토리묵 도시락을 건네는 여인의 울음은 얼마나 많은 민초들을 위로했을까. 그는 “이러한 우리 노래들은 단지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며 “금봉이의 눈물 속에는 ‘가난을 극복하자’는 한 서린 다짐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희끗한 머리의 늙은 운동가는 이렇게 노래를 통해 앞으로 펼칠 활동의 동력을 얻는다. 이 공연의 모든 수익금은 진보 운동을 위한 학술, 문화 활동 기구인 ‘노나메기재단’의 설립에 사용될 계획이다.

지금 백기완은 왜, 트럼프에게 삿대질을,. 그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되,.

백 소장은 한반도 전쟁과 통일 문제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더욱 앞장서야 한다"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문재인 대통령이 제일 먼저 전화를 거는 건 트럼프와 아베일 텐데 그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조계종 적폐청산'을 촉구하며 단식에 돌입한 명진스님에 대해선 "명진스님은 거짓말 한 적이 없고 욕심 부린 적도 없는데 그게 무슨 부패냐"며 "왜 그의 승복을 벗기느냐 말이다. 문화예술인이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명진스님은 단식한 지 17일 만에 건강악화로 어제(5일) 병원으로 옮겨져 회복 중이다.

백 소장은 현재 파업 중인 언론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도 답했다.

"언론적폐 청산을 위해 지금 파업 중인데 이 또한 대통령이 나서서 언론자유를 위해 부패 언론인들을 내쫓고 장본인들을 처단해야 한다. 촛불에 의해 대통령이 된 만큼 그가 앞장서야 할 때다."

통일이란…‘노나메기(사전에선 노느메기)’ 세상 만드는 것

“노나매기 인간형이 바로 통일적 인간형이야. 그럼 어떤 게 통일적 인간형이냐. 몽양 여운형 선생이 스물한 살 때 독립운동하러 가시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노비문서를 불지르고 땅을 노비들에게 다 나누어줬어. 돌아가실 때도 땅 한평 없이 가셨어. 49년도에 암살당한 백범선생도 뭘 남겼어? 입던 두루마기하고 신발밖에 남긴 게 없어. 장준하 선생도 땅 한평, 집 한칸 안남겼어.
통일이라는 게 뭐야. 세계의 분열과 분단을 전제로 해서 한반도의 분단을 해결하는 거잖아. 양심이 분열되면 안되는 거야. 사회적 분열을 통일하는 몸부림을 통해서 내적분열을 통일하는 인간상, 나는 그런 사람을 통일꾼, 통일적 인간형이라고 생각해.”백 소장은  ‘노나메기’라는 말을 즐겨 썼다. ‘같이 일하고 같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뜻하는 이 말을 따 계간지 ‘노나메기’를 발행하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 역시 ‘노나메기’다.

“1년 동안 야구장에서 응원하는 사람이 3백만영이 안된다고 하는데, 골프 인구가 1500만명이라고 하더라구. 절대빈곤층이 20%가 넘는 상황에서 통일되면 과연 누구를 위한 통일이겠어. 잘사는 사람, 가진자를 위한 통일이지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통일은 아니지.”

백 소장은 노동자, 농민, 도시의 소시민이 주도하는 통일, 즉 ‘노나메기’ 세상을 이룰 수 있을 때에만 통일의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바라는 것 또한 이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백 소장은 1988년 독일에서 작곡가 고 윤이상씨를 만났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윤이상 선생 집에 초대를 받아 갔더니 뜰 한켠에 진달래가 피어 있었어. 그때 난 ‘북쪽에 다녀오셨군요?’라고 물었지. 선생님께서 ‘북쪽은 아니고, 고향에 다녀왔어’라고 말씀하시는데 큰 충격을 받았지,.

▲ 노나메기 후원계좌

바로 그거야. 통일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어야 하지 않겠어?”결국 난 백기완 선생님의 친필 서명이 있는 두꺼운 책 두 권을 받아 들고서야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인터뷰라기 보다는 1시간여 동안 재미있고 유익한 강의를 들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때로는 웃어가며, 때로는 꾸지람도 들어가면서 말이다.

그가 살고 있는 통일문제연구소는 대학로의 한 골목 끝에 위치해 있었다. 허름한 2층 양옥집으로 담쟁이가 넝쿨을 이루고 있어서인지 운치가 있었다.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책장에 꽂혀진 책들과 신문, 원고지 뿐이었다.

노나메기 http://nonamegi.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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