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은 노인 남성을 상대로 성노동을 하는 ‘박카스 할머니’ 중에서도 ‘죽여주기’로 유명하다. 전쟁고아, 식모, ‘공순이(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동두천 미군 기지촌의 ‘양공주’, 종로의 ‘박카스 할머니’.   소영이 65년 간 걸어온 길이다. 그러나 소영이 스스로를 불렀던 이름은 아니다. 타인들이, 이 사회가 그녀를 불렀던 이름들이다. 왜 그녀가 그 길을 걸었는지, 걷는 동안 그녀의 삶은 어땠는지 사회는 관심이 없다. 사회는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녀의 정체성과 삶을 그 이름에 묶어 놓는다.

 ‘박카스 할머니’를 취재하기 위해 소영을 찾아온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이렇듯 무심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영이 주는 박카스를 받아들고 함께 모텔방에 들어선 제작자는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고, 넌지시 소영의 월수입을 묻는다. 이후 제작자가 취재 사실을 밝히자 소영은 자리를 뜨려 하고, 제작자는 다급하게 말한다. “할머니 들어보십시오.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규모 11위인데도, 그에 비해 노인 빈곤율은 OECD 최상위 국가거든요. 아직도 이렇게 어두운 그늘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노인분들이 많다는 게 저는 참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작자는 고작 십여 분 대화를 나눈 소영의 삶을 객관적인 수치로, ‘고통’, ‘어두운 그늘’과 같은 단정적인 단어로 설명한다. 소영은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정의하는 제작자, 그리고 이 사회에 답한다. “할머니, 할머니 하지 말아요. 듣는 할머니 기분 나쁘니까.”

‘할머니라 부르지 마라’는 소영은 사회가 붙인 이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완전히 반박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이름과 평가에 자신의 ‘사연’으로 답할 뿐이다. 그녀는 취재 요청에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니 부끄러울 건 없는데, 대놓고 쪽팔릴 맘도 없다”고 답한다. 이후 어쩔 수 없이 취재에 응한 소영은 “다들 손가락질하지만, 나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아냐”며 “꼴에 빈병이나 폐지 주우며 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고 말한다. ‘진정성 있는 얘기를 해달라’는 제작자의 기대와 달리, 소영은 아름답고 슬픈 서사로 자신을 설명할 마음도, 이유도 없다. 자기 삶에 붙여진 이름과 평가를 넘어 그저 자신의 사연을 읊을 뿐, 구태여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자기 삶이 고귀하다고 포장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소영의 태도는 타인에게도 적용된다. 소영은 트랜스젠더 티나와 한 다리가 없는 도훈, ‘코피노’ 아이 민호와 대안가족의 형태를 이루며 살고 있다. 소영을 포함한 ‘가족’들은 서로를 함부로 이해하려 하지도, 무턱대고 위로하려 들지도 않는다. 가끔 서로를 ‘하자 있는 인간’,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과 같이 놀리면서도 치킨이나 피자를 나눠먹고, 담배 몇 갑을 주고받으며 민호를 맡기고 맡아준다.

▲ 소영은 탑골공원과 장충단공원에서 남성 노인에게 "연애하고 가실래요?"하고 묻는다. ⓒ씨네마

그런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는 노인들이 찾아온다. 지난날 소영을 통해 성욕을 해소했던 노인들이, 이제는 자신을 욕되게만 하는 삶을 해소해달라 부탁한다. 첫 번째 ‘고객’은 과거 소영에게 새 지폐로만 ‘지불’하고, 맞춤양복만 입던 멋쟁이 세비로 송이다. 그는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에 누워있다. 소영이 병실에서 마주한 세비로 송은 더 이상 ‘멋에 죽고 멋에 살지’ 못한다. 세비로 송의 자식들은 그가 듣는 앞에서 소영을 ‘할머니 꽃뱀’으로 의심하며 말한다. “그렇잖아요. 몸도 이러신 분을 괜히 왜 만나요? 무슨 목적 있지 않으면.” 소영은 부모를 ‘산송장’ 취급하는 자식들을 보고, 간병인이 세비로 송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동안 가만히 뒤돌아 있다. 세비로 송은 사는 게 창피하다며, 죽고 싶다고 소영에게 말한다. 다음날 자정 소영은 세비로 송의 입에 농약을 넣어주고, 차마 그 얼굴은 보지 못한다. 울컥울컥 그의 입에서 농약이 넘치는 소리만 힘겹게 듣고 있다.

두 번째 ‘고객’은 치매에 걸린 독거노인 종수다. 소영은 오랜만에 만난 옛 고객 재우와 그의 친구 종수의 집을 찾아간다. 한 평 남짓한 쪽방에서 반주를 걸치던 셋은 방금 먹은 약을 또 먹으려는 종수에 당황한다. 종수는 혼란스러워하며 “이제 내가 재우 너도 못 알아볼 날이 올 텐데, 그 땐 네가 나 좀 보내주라”고 자조하듯 말한다. 소영이 세비로 송을 죽여줬다는 사실을 아는 재우는 “의지할 데 하나 없이 지 이름조차 잊을 종수가 불쌍하지 않느냐”며 소영에게 종수를 죽여달라 부탁한다. 소영은 “저 분 자존심 같은 거 제 알 바 아니에요”라며 거부하다가도, 결국 부탁을 들어준다. 셋은 한 명의 죽음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산에 오르고, 소영은 종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준다.

마지막으로 소영을 죽여주는 여자로 만드는 이는 재우다. 종수의 죽음 이후 재우는 데이트를 하자며 소영과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방에 함께 들어선다. 소영은 미군과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을 입양 보낸 얘기를 하고, 재우는 한창 나이에 사고로 죽은 자식과 5년 전 죽은 아내 얘기를 한다.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느냐”고 되뇌던 재우는 혼자 남아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비참하면서도, 홀로 죽을 자신은 없다. 재우는 소영에게 수면제 한 알을 주고, 남은 알약을 모두 자신의 입에 털어 넣는다. 다음 날 아침 나란히 누워있는 두 사람 중 소영만이 깨어난다. 소영은 죽기조차 혼자 못하는 중풍 환자, 치매에 걸려 잊을 날만 보내는 독거노인, 혼자 남아 외로운 노인을 죽였다. 아니 죽여줬다.

그러나 소영은 그들을 죽여줬으되 그들의 이야기를 죽이지는 않았다. 사회가 제멋대로 붙인 이름과 평가에 자신의 ‘사연’으로 답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도, 포장하지도 않았던 소영은 노인들의 죽음 앞에서도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인다. 재우를 죽여줬던 자신을 ‘금품을 노리고 혼자 사는 노인을 호텔방으로 유인해 살해한 노인 여성’으로 보도하는 뉴스를 보고 소영은 혼잣말을 한다. “그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노인의 죽음을 ‘OECD 노인 자살률’, ‘노인 빈곤율’과 같은 수치로 환원하거나, 죽음 앞에서 ‘그래도 살아야지’라며 윤리와 당위의 문제를 들이대는 이 사회와 달리, 소영은 그들의 삶을 무턱대고 위로하거나 살아야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사회가 외면한, 삶 자체가 모욕인 사람들의 ‘속사정’을 듣는다. 파묻힌 사연들에 귀 기울였던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무연고자’로 표기된다. 또 하나의 ‘속사정’이 죽는 장면에서 우리에겐 버석한 쓸쓸함만이 남는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