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던 A(8)는 어머니마저 가출한 후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룹홈의 시설장님은 A의 통장을 만들고자 했으나 통장을 만들지 못했다. 친권자인 어머니가 개설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A와 같은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B(12)는 두 살 무렵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할머니 손에 자라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 그룹홈에 왔다. 할머니가 남겨주신 약 800만원 가량이 B의 통장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예금이 몽땅 사라졌다. 어디에서 생활하는지 모르는 아버지가 통장의 돈을 모두 인출해 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지만 B의 친권자이기 때문이다.

후견인에 관한 특별법 있지만 제 역할 하지 못해

통장을 만들어 친척들로부터 받은 용돈을 저축하고, 아프면 부모님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방학 중 여권을 만들어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이는 우리 주변 아이들의 흔한 일상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러한 일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어떠한 아이들은 통장을 만들기 힘들고, 여권을 만들지 못해 해외여행을 포기한다. 시급한 의료수술의 경우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친권자의 동의가 없어도 수술을 할 수 있지만 위험부담 때문인지 친권자의 동의를 받아오라는 병원도 있다. 상담 중 한 아동복지시설의 시설장님은 “알음알음 아는 의사한테 가는거죠”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러한 경우 아이의 후견인을 선임하면 된다. 우리나라에는 보호시설의 아이들의 후견인 선임을 위한 특별법이 존재한다. “보호시설에 있는 미성년자의 후견 직무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다. 점차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범위는 늘어나 미혼모자가족복지시설, 성매매피해자 청소년지원시설 등 많은 시설이 이 법의 적용을 받으며, 이 법은 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경우 민법보다 간소한 절차로 후견인이 될 수 있도록 후견인지정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아이가 고아인 경우에는 시설을 설치․운영하는 주체에 따라 곧바로 시설장이 후견인이 되거나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후견인 지정을 받는다. 아이가 고아가 아닌 경우라면 이에 더해 법원의 허가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보호시설에서도,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러한 법률과 후견인지정절차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아이의 후견인이 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이를 안내받을 기관도 마땅치 않다. 거기다 지방자치단체장으로부터 후견인지정서를 받더라도 후견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법원의 재판서가 아니므로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통장을 만들기 위해 은행에 가더라도 후견인지정서만 요구하는 지점, 법원의 재판서나 기본증명서를 요구하는 지점 등등 일관되지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법은 있으나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남보다 못한 부모…발만 동동 구르는 시설들

흔히 드라마에서는 계부나 계모가 아이들을 학대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친부모가 가해자인 아동학대사건이 전체의 76.3%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따뜻한 부모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을 시설에 맡긴 후 술을 마시고 찾아와 문을 발로 차며 소위 행패를 부리는 부모부터 10여년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이의 예금을 몽땅 가져가 버리는 부모도 있다.

아동복지법은 아동복지시설의 시설장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검사에게 아이 부모의 친권을 제한하거나 상실하도록 청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검사는 이를 검토한 후 법원에 친권의 제한․상실청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또한 실효성있게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아동복지법 제12조는 친권제한이나 상실청구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각 지방자치단체에 아동복지심의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있지만, 위원회가 구성되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도 있으며, 한 번도 개최되지 않은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또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마다 일회성으로 열리다보니 제대로 된 심의가 힘든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동복지시설의 관계자들도 아이들의 부모의 친권을 제한할 필요성이 있더라도 어디서 상담을 받아야 할지, 어디에 신청을 해야할지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호시설의 아이들…사회가 보호해줘야

시설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의 학대든, 방임이든 한 번씩 상처를 받은 경우가 많다. 이미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한 번 지켜주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시설에 입소한 후에도 자기 명의로 통장을 만들려다 좌절하고, 여권을 만들려다 좌절하고, 수술을 받으려다 좌절해야겠는가. 부모가 자신의 통장의 돈을 모두 가져가버려도 발만 동동 구른다면 아이들이 이 사회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가정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들이라면 이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낮다는 이야기는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출산율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살아가기에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후견인 지정절차를 돕는 기관이 필요하다. 또한, 후견인 지정절차에 대한 관계자들의 인식을 제고하고, 복지분야의 인력부족 문제 해소 등 제도의 현실화가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두 번 상처받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어른들의 역할이다.

[백주원 변호사는 서울시복지재단 내에 있는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주로 아동인권 분야 및 기초생활수급자 등 복지 분야에서 법률지원을 하고 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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