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부가 5명 이상 정치집회를 금지하는 비상칙령을 발효한 가운데 반정부 집회 주최 측은 18일 수도 방콕에서 경찰을 따돌리며 게릴라식 집회를 개최했다.

지난 14일 이후 5일 연속 시위를 이어가는 것이다.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지난 15일 집회 금지 비상 칙령을 발령하고, 경찰이 16일 물대포를 동원해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으나, 이날 게릴라식 집회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최소 1만명이 참여했다.

반정부 시위대가 체포된 반정부 지도부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18
반정부 시위대가 체포된 반정부 지도부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2020.10.18

일간 방콕 포스트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반정부 집회 주최 측인 '탐마삿과 시위 연합 전선'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지지자들에게 이날 오후 3시(이하 현지시간)까지 방콕 전철역 주변으로 모여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오후 4시 집회 시작 직전 도심에 있는 승전기념탑을 주요 집회 장소로 전격 공지했다.

경찰이 사전에 집회 장소를 봉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전술이다.

승전기념탑 앞에는 경찰 추산 1만명이 몰려 쁘라윳 내각 퇴진과 군부 제정 헌법 개정, 왕실 모독죄 폐지를 촉구했고, 현지에서 오랜 기간 금기시됐던 군주제 개혁을 요구했다.

주최 측은 또 방콕 시내 아속 교차로와 19개 주(州)에서도 연대 집회가 열린다고 밝혔다.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등 6개국에서도 동조 집회가 개최됐거나 개최될 예정이다.

당국이 지난 13일부터 집회 주동자와 참석자 등 70여명을 체포하고 17일에 이어 18일 오후에도 도심 주요 전철 역을 폐쇄했지만, 반정부 집회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전날에도 주최 측은 방콕 시내 4곳에서 이 같은 게릴라식 집회를 개최했는데, 참가자가 경찰 추산으로도 2만3천명에 달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집회 참석자들은 17일 오후 8시를 기해 자진 해산했고, 경찰도 강제 해산을 시도하지 않아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주최 측은 18일에도 오후 8시 자진 해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태국의 반정부 집회는 지난 2월 젊은 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야당인 퓨처포워드당(FFP)의 강제 해산으로 촉발됐고, 현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7월부터 다시 불붙었다.

"아버지는 국왕 비판 자체가 범죄라고 가르치셨죠. 일종의 금기죠. 아버지와 이 이야기를 하면 말다툼을 하고 하루를 망치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다나이(19·가명)는 쁘라윳 짠-오차 총리 퇴진과 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섞여 올여름을 방콕 시내를 누볐다.

그는 중상류층에 속하는 아버지와 비교적 관계가 좋은 편이지만, 국왕 얘기만 나오면 싸우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한번은 내가 왕을 비판했는데 차 안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어요. 아버지에게 국왕은 감히 비판할 수 없는 존재죠.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할 수 없다며 크게 화를 내셨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저에게 더는 말씀을 안 하세요"

군주제를 두고 다나이 부자간에 벌어진 이런 세대 갈등은 이제 태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BBC 방송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태국에서 국왕은 한때 인간과 함께 사는 신(神) 또는 국민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존재였다.

국왕을 비롯한 왕족을 가까이서 알현할 때 대부분의 태국인은 무릎을 꿇고 땅바닥을 기듯 다가간다. 총리를 비롯한 고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왕가 사람들이 죽었을 때 화장터도 신이 사후에 돌아간다는 '수미산'(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 모양으로 꾸며진다.

2014년 쿠데타의 주역인 쁘라윳 짠-오차 장군(현 총리)이 故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을 알현하는 모습[epa=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쿠데타의 주역인 쁘라윳 짠-오차 장군(현 총리)이 故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을 알현하는 모습[epa=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태국 국왕의 권위는 13세기 수코타이 왕조로부터 시작된 오랜 왕정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2016년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전 국왕의 영향이 크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1946년 19살의 나이에 즉위한 푸미폰 전 국왕은 2016년까지 무려 70년을 재위했다.

 더욱이 그는 생전에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어려운 국민들의 손을 잡고, 다양한 개발사업을 추진해 태국을 중진국 반열에 올려놓으며 국민의 추앙을 받았다.

 현재 태국 국민 대다수는 그런 푸미폰 국왕 재위 기간에 태어나 성장하고 나이를 먹었다. 동시에 이들은 자연스레 국왕을 존경하라고 교육받았다.

 지금도 모든 공적인 행사는 물론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도 국왕 찬가가 연주된다.

 또 태국 전역의 도로와 상가 등 공공장소에는 어김없이 국왕의 초상화가 내걸려 있다.

시위대 뒤로 보이는 와치랄롱꼰 국왕의 초상화[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시위대 뒤로 보이는 와치랄롱꼰 국왕의 초상화[로이터=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런 왕가 존중 문화는 왕실 모독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형법 규정까지 만들어 냈다. 태국 형법 112조는 왕과 왕비, 왕세자와 섭정자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는 경우 최고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932년 절대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로 전환됐지만, 국민의 존경과 사랑으로 포장된 '사실상의 절대왕정'이 유지된 셈이다.

그러나 푸미폰 전 국왕 서거 직후인 2016년 12월 왕위가 그의 아들인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국왕에게 넘어가면서 군주제를 지탱했던 국민의 존경과 사랑이 예전 같지 않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기에는 수차례 반복된 결혼과 이혼 등 와치랄롱꼰 국왕의 복잡한 사생활과 잦은 해외(독일) 체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4번째 부인인 현 수티다 왕비와 결혼한 지 두 달만인 지난해 7월 또 다른 여성을 '배우자'로 맞이하기도 했다.

태국 국왕의 배우자[AP=연합뉴스 자료사진]
태국 국왕의 배우자[AP=연합뉴스 자료사진]

 또 와치랄롱꼰 국왕은 400억 달러(한화 약 45조8천억원)에 달하는 왕실 재산과 군대를 사유화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전 세대가 경험했던 '국왕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이런 국왕의 행보는 그저 비판과 타파의 대상일 뿐이다.

총리 퇴진을 요구하며 최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 시위대는 '무소불위'로 부를만한 국왕의 막강한 권한 행사와 왕실 재산 개인화에 불만을 제기해 기성세대를 놀라게 하고 있다.

다나이의 아버지 파껀(가명) 씨는 "나는 라마 9세(푸미폰 전 국왕) 재위 당시에 태어났다. 그는 자녀들보다 국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나는 그가 장수할 수 있다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각오까지 했다"며 "하지만 우리 아들과 같은 'Z세대'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젊은 세대는 이런 아버지 세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다나이는 "아버지는 국왕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이 멀었다. 아버지와 얘기하면 건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며 "아버지가 다른 문제를 대할 때처럼 (군주제 문제도) 열린 마음으로 대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수티다 왕비가 탄 차량을 향해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시위대[로이터=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수티다 왕비가 탄 차량을 향해 세 손가락 경례를 하는 시위대[로이터=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다나이는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국왕에 충성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어머니조차도 '군주제 개혁'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그는 또 자신이 나이가 들고서도 지금처럼 군주제 개혁이 맞는 방향이라는 생각을 유지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입장도 밝혔다.

다나이는 "군주제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내가 어떤 정보를 접할지에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BBC는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고 나서 태국 전역의 가정에서 이런 갈등이 불거졌으며, 부모와 자녀, 형제와 자매가 이방인이 되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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