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인물론(35) 개국공신의 치욕적 몰락을 보다.

작은 인재를 크게 쓰면 일과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

명 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유기(劉基)는 앞날을 예측하는데 아주 뛰어난 인물로, 그가 지은 『추배도 推背圖』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가 정말로 뒤로 3천 년, 앞으로 5백 년을 내다 볼 수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남다른 지혜가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한번은 주원장(朱元璋)이 유기에게 이선장(李善長)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이선장은 개국공신이자 원로로서 여럿의 대신들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인물입니다. 단지 뜻은 큰데 능력이 부족해 뒷일을 예측하기 어려울 뿐이지요.”

과연 유기는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었다. 명 왕조의 개국 재상인 이선장은 개국하기 전에 많은 공을 세웠고 개국한 후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지위와 권력을 누리긴 했지만, 사리와 식견이 분명하지 못해 황제로부터 사약을 받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소하나 장량, 방현령, 두여희, 유기 등과 비교해볼 때, 그는 처음은 좋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던 개국 재상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선장은 자가 백실(百室)로 1314년에 봉양의 소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적당한 교육을 받아 시서화에 통달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난세를 다스리는 이치를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계산에 뛰어났고 능력도 갖추고 있어 지방에서는 위세와 명망이 대단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대업을 이루겠다는 웅대한 뜻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주원장은 문인들의 역할을 매우 중시했고, 특히 동향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1354년, 주원장은 군사를 이끌고 저주로 진군하는 도중에 이선장의 고향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주원장의 위세와 명망을 익히 들어왔던 이선장이 자신을 부하로 받아달라고 요청하자 기꺼이 맞아들였다.

이선장이 주원장에게 제시한 첫 번째 지략은 동향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여 대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이 주원장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고 유방이 보통 서민에서 기병한 것도 주원장의 출신성분과 다르지 않다고 전제했다. 이선장은 유방이 천하의 대세를 정확히 판단하고 넓은 도량과 웅대한 뜻으로 영웅호걸과 현사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온갖 치욕을 견뎠기 때문에, 진의 폭정을 전복시키고 항우를 물리쳐 한 왕조를 세울 수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주원장으로 하여 유방을 본받아 원나라 정권을 전복시키고 명 왕조를 세울 수 있도록 격려했다.

이때만 해도 확실한 목표나 방향이 세워져 있지 않았던 주원장은 이선장의 말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는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부터 주원장은 황제가 되어야겠다는 신념과 목표를 확실히 다지게 되었고 아울러 이선장을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이선장은 주원장의 막부에서 기실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업무가 과중했지만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는 지극한 충성과 성실성을 보였다. 곽자흥이 주원장을 경계하며 이선장마저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려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이선장은 당장 곽자흥에게 달려가 주원장 외에는 다른 누구도 섬길 수 없다면서 눈물로 간청하여 인사이동을 저지한 적도 있었다. 이에 주원장은 크게 감동했고,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이선장은 대사를 이루기 위해선 먼저 위신을 세워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떠돌이 졸개로 전락하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군대의 규율을 매우 중시했고 주원장에게도 여러 차례 자신의 견해를 역설했다.

1356년을 전후하여 주원장의 군대는 수많은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힘든 전투를 계속하다 보니 병사들 사이에 민간에 대한 약탈 행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태평부(太平府)에 진주했을 때는 주원장이 약탈 행위를 저지르는 자는 무조건 참수하겠다는 군령을 내리고 정찰대를 파견하여 감독한 결과, 군률을 어긴 병사들 여럿이 처형되기도 했다. 하지만 약탈 행위를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진강을 점령했을 때 이선장은 병사들이 또다시 약탈 행위를 저지를 것이라 예상하고 주원장과 서달(徐達)의 도움을 얻어 연극을 꾸몄다. 주원장은 일부러 서달의 부하가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를 내세워 서달을 구속하고 삼군에 그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이선장이 재삼 간청하여 서달을 풀어주되 진강성을 점령한 뒤에 또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과연 이선장이 꾸민 연극은 큰 효과를 보았다. 서달처럼 유명한 장수도 처형당할뻔했는데 하물며 무명의 병사들이 군율을 어겼다가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모두 욕심을 자제하여 약탈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선장은 문치에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무공에서도 적지 않은 지모를 발휘했다. 한번은 주원장이 출병하면서 이선장에게 화주성을 지키도록 당부했다. 이선장은 원군이 기습공격을 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성밖 요충지에 병력을 매복시켰다. 예상대로 원군은 시작하기 무섭게 복병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여 돌아갔다.

싸움에서 돌아온 주원장은 이선장의 전과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적은 병력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물리친 그의 전공이 갑옷에 창을 든 무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주원장이 장사성(張士誠)과 진우량(陳友諒), 그리고 원군에 대항해 싸울 때 이선장은 줄곧 응천부에 남아 주원장을 대신해서 근거지를 잘 지켜냈다. 응천부의 지세는 대단히 험준한 데다가 거대한 바위를 등지고 건축되어 있어 지키기는 수월해도 공격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선장에게 이곳을 지키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원장이 그의 충정과 능력을 얼마나 신임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선장은 주원장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응천부의 정치와 경제를 주도면밀하게 관리했고 초한전쟁 시기에 소하가 한중을 지켰던 것처럼 주원장을 위해 아낌없는 충성을 다했다.

중요한 것은 이선장이 다른 군대의 전례에서 교훈을 얻은 바도 적지 않았지만, 주원장의 충고를 잊지 않고 문관과 무장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문관들은 나라 안을 다스리는 데 힘쓰고 무장들은 밖에서의 실제 전투에 지모를 발휘하는 것이 관례지만, 문관들의 지모가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 작용을 한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관들이 범하기 쉬운 과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장들의 실수를 지나치게 비판하고 이들의 군공을 시기하며 장수와 병사 사이를 이간시켜 전선을 약화한다는 것이다. 이선장은 이점에 주의하여 장수들의 적극성을 유도하고 이들을 단결시키는 데 주력했으며,
나라 안을 다스리는 데도 이런 방식을 활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서기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했다. 이에 필요한 모든 의식은 이선장이 주재했다. 이로써 그는 일개 말단 관원에서 개국공신으로 성장하여 개국보운(開國輔運) 한국공(韓國公)에 봉해젔다. 이선장을 봉상하는 조서에서 주원장은 그가 자신이 동정서벌(東征西伐)하는 동안 근거지를 지키고 군량과 무기를 조달하는 데 한 치의 착오도 없었으며 군민을 잘 통솔하여 온갖 원성을 가라앉혔으니 그의 공은 한 대의 소하 보다 더하다고 칭찬했다.

이선장이 주원장의 칭제 과정에 세운 공은 대충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군문(軍門)에 들어가자마자 주원장에게 유방의 사적을 들어 그를 본받도록 종용했고 둘째, 그를 위해 충성을 다하면서 후방을 잘 다스렸으며 셋째, 각 계층을 하나로 조화시켜 민심을 장악했다. 이 세 가지 공적은 설사 지략이 다소 부족했다 하더라도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선장은 소하나 장량 같은 인물에 비견할 수 없었고 심지어 유기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는 명 왕조의 개국에 대한 그의 공이 작았기 때문이 아니라 식견이 높지 못하고 저속함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해 결국, 살신의 화를 자초했기 때문이다.

『명사 明史』 「이선장전 李善長傳」에서는 그를 헐뜯는 말을 서슴지 않으면서 그의 성격적 결함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겉모습은 관대하고 넉넉했지만, 속이 좁고 고집스러웠으며 자신만을 사랑하고 남을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통해 개국 이후에 드러난 많은 허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개국 이후 이선장은 승상이 되었고 권세 또한 막강했다. 그의 측근 중 하나인 중서성 도사(都事) 이빈(李彬)이 뇌물수수죄를 저질러 당시 어사중승이었던 유기로부터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선장이 여러 차례 압력을 행사하여 처벌을 저지했으나 유기는 주원장에게 상소를 올려 이빈을 처형하게 했다. 이선장은 이에 앙심을 품고 음모를 꾸며 사람을 시켜 유기를 무고하게 한 다음, 자신이 직접 유기를 탄핵하여 관직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유기는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큰 화를 면했다.

또 이선장은 참의(參議) 이음빙(李飮冰)과 양희성(楊希聖)이 자신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코를 베고 가슴살을 도려내는 혹형을 가하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그의 치졸한 행위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희하 출신의 세력을 키우면서 일게 지현 출신인 호유용을 승상으로 발탁했다. 그러자 호유용은 권력을 이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등 갖가지 부정부패를 저질러 조정과 민간에 원성이 자자했고 정직한 대신들의 비난을 샀다.

이에 주원장이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비밀리에 모반을 준비하여 주원장을 궁궐 밖에서 시해하려 했다. 그러나 모반 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어 호유용은 참수되었고, 3만여 명의 사람들이 이에 연루되어 몰살당했다. 이선장은 호유용의 오랜 친구이자 그를 추천한 장본인이었고 친척 관계로 맺어져 있었던 만큼 함께 처형하는 것이 마땅했지만 주원장은 그가 개국공신인 점을 고려하여 관직을 박탈하는 것으로, 죽음을 면하게 했다. 그러나 후에 별자리에 이상이 생기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를 구실로 사약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나이 77세였던 이선장뿐 아니라 70여 가족들이 함께 사약을 받았다.

이선장은 공(功)으로 시작하여 죄(罪)로 끝을 맺었다. 중국 역사에는 시작이 좋았던 인물은 많았지만, 끝이 좋았던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본인이 자초한 것도 있지만,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경우도 많았다.

당나라의 개국 재상이었던 방현령과 비교해볼 때 이선장은 재능과 식견, 그리고 의지의 지향에 있어서 크게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똑같이 재상의 관직과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이 운만 따르는 것도 실제로는 화를 초래하는 함정이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지모와 능력을 갖추고 나서 운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치를 알았던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단지 일시적인 기회와 운세로 인해 성공을 거두고 나서 자신을 진명천자(眞明天子.-자신만이 현명한 군주)로 자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리를 망각하고 자신을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평가하지 못한 결과는 항상 파멸의 함정뿐이었다.

위의 사건은 운이 좋아 현재 우리나라 권력의 정점에 올랐으나, 그 권력을 주체하지 못해 남용하고 오용하여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무소불위로 사익을 일삼아 온 지탄받고 있는 모든 권력! 특히 편파적인 수사로 항상 말썽이 된 정치검찰이 꼭 알아야 할 주요한 대목이요 사례이며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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