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광’은 아니어도 매달 2~3번 정도는 마눌님 모시고 영화관에 갈 정도로 영화를 좋아한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에는 2월엔가 3월엔가 「1917」이란 영화를 본 후 영화관에서 본 영화는 「강철비2」가 유일하다. ‘넷플릭스’에 가입해 볼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워낙 ‘재미’에 탐닉하는 성격이어서 자칫 하루종일 일은 제대로 못하고 PC 앞에서 허송세월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유튜브로 영화를 본다.

2시간 짜리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15분 정도로 요약한 것을 주로 본다. 시간도 절약될 뿐 아니라 상영관에 걸리지 못했던 영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던 영화, 내가 보고 싶었으나 놓쳤던 영화까지 볼 수 있어 좋다. 너무 짧게 줄여놓아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을 우려가 있긴 한데 역시 전문가가 전문가다운 해설을 붙여 그 빈 틈을 메운다.

유튜브가 이용자의 성향을 분석해 이용자가 관심을 가질만한 프로그램만 계속 추천한다고 불만들이 많던데 내 경우 영화를 볼 때는 그 점이 오히려 좋다. 외부 약속이 없는 주말이나 일요일에는 반나절 내내 내 취향에 맞는 영화만 10여 편 섭렵할 수 있다.

어제는 유튜브가 내 친(親)언론 성향을 알았는지 「베로니카 게린」이란 전혀 모르고 있던 영화를 소개해줘서 2번이나 연속해서 관람했다.

아일랜드 마약갱단들을 취재하다 1996년 37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아일랜드 「선데이 인디펜던스(SI)」 여기자 베로니카 게린을 그린 2003년 작 전기 영화이다. 1994년 베로니카 기자가 취재에 들어갈 당시 아일랜드는 마약으로 인해 범죄율이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15,000명이 매일 마약주사를 맞았고 14세 아이가 중독자 명단에 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베로니카 기자의 취재가 마피아 조직 심층부에까지 이르자 매수 시도와 협박이 잇따랐고 실제 자택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부상까지 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취재를 계속하다가 결국 암살당하고 만 것이다. 

영화는 한 아이의 엄마인 베로니카 기자가 마약 취재에 나선 동기, 지난한 취재 과정, 범죄조직을 맞상대하면서 느끼는 인간적인 두려움과 고뇌, 끝내 암살당하기까지의 몇 년간을 밀도 높게 그리고 있으나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에필로그에 있다.

그녀의 암살은 아일랜드 국민들을 격동시켜 수많은 더블린 시민들이 매주 거리로 나와 마약 반대 행진을 했으며, 마약상들은 더블린에서 추방되고 마약 부호들은 지하로 숨게 되었다.

그녀의 사망 1주일 후 긴급 국회가 소집되었고, 정부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여 대법원에서의 마약 용의자 재산 압류를 승인했다.

같은 해엔 범죄 자산 관리국(CAB)이 발족되어 범죄 용의자들의 출처가 불분명한 재산을 조사하고 몰수할 수 있게 되었다.

브라이언 미한은 베로니카 게린의 살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며, 그의 재산은 CAB에 의해 몰수되었다. 유진 홀랜드는 마약거래 혐의로 20년형을 선고 받았고, 그의 재산 역시 CAB에 의해 몰수되었다.

잉글랜드로 도망친 후 본국 송환 요구에 오랫동안 저항하던 두목 존 길리건도 결국 송환되어 28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의 재산 역시 CAB에 의해 몰수되었다. 무엇보다 베로니카 사망 다음 해 아일랜드 범죄 발생율이 15% 감소했다. 베로니카 기자는 취재로써 채 이루지 못한 일을 자신의 죽음으로 완수했던 것이다.

한 사람(기자)의 헌신적 노력, 그리고 희생이 우리 사회를 지키고 성장시킬 수 있음을 완벽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 영화를 소개한 전문가는 ‘베로니카 게린의 사망 후 지난 6년 간 전 세계에서 196명의 저널리스트가 업무 중에 암살당했다’는 자막과 함께 “기자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과 연결되는 직업이라는 개념보다 사회정의, 그리고 공익을 실현하는 이 사회의 항체 역할이 진정한 기자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멘트를 붙였다.

이 전문가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양식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언론자유도 최정상인 이 나라인데 왜 베로니카 게린 같은 기자는 없느냐고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親)언론주의자’인 내가 한 마디 변명을 하자면 이 나라에는 베로니카 같은 기자 혹은 기자 지망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 베로니카 기자가 일했던 「선데이 인디펜던스(SI)」 같은 신문사가 없을 뿐이다.

그리하여 베로니카 같은 기자가 활약할 수도, 아예 기자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출입처에서 와글와글, 불러주는대로 써재끼며 클릭수에 목매다는 기자들만 살아남는 것이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