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4일 막내린 '을지판타지아'전
요즘 핫한 '힙지로' 예술옷으로 단장

[ 서울=뉴스프리존]편완식미술전문기자=가을이 꼬리를 내리고 있는 을지로 골목길을 걸었다. 동행자는 미술평론가 김웅기. 그는 1980년대 초 뉴욕 이스트빌리지의 예술가들이 시의 재개발을 반대하고 다양성의 공존을 촉구하기 위해 기획했던 ‘타임스퀘어 쇼’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철공소와 인쇄소로 가득했던 을지로 골목은 요즘 ‘힙지로’라 불리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좁고 어두운 골목사이에 작가 작업실,디자인스튜디오,카페가 들어서고 힙스터들이 모여들고 있다. 마침 이곳에선 ‘을지판타지아’전(11월14일까지)이 열리고 있었다.

해가 얼굴을 감춘 산림동 골목은 예상과 달리 포근했다. 을지로 공구 골목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친, 낡고 꼬불꼬불하게 협소한 골목은 보름달 밤처럼 은근히 밝았다. 낮에도 을씨년스럽던 골목이 아닌가. 사람들이 오고 가고 드문드문 삼겹살나 순댓국 파는 허름한 오랜 점포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힙스터들이 올듯한 작은 와인바나 디자인 스튜디오 간판도 별처럼 반짝거렸다. 납작하고 허름한 가게 아래에서 고개를 들어보면, 종로와 충무로 을지로 서쪽의 고층 건물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도슨트의 안내로 돌아보는 ‘을지 판타지아 투어’는 이런 간접 조명 효과 때문에 아련한 꿈길 같았다.

낮은 건물의 외벽과 투박한 지붕, 그리고 허름한 가게의 셔터 등에 작가들의 작품이 현수막에 확대 전사돼 걸려있다. 가로등 조명만이 그것을 비추고 있었다. ‘을지 산수’라는 기획 아래 13명의 예술가들의 평면 작업이 더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다. 산림동의 비좁고 초라한 골목길이 달빛을 배경으로 형형색색으로 채색된 풍경이었다. 불연 듯 그 속을 거닐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불현듯 꿈길이 아니라 모니터 속의 게임이나 영상 속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리적 가상과 디지털 가상이 어떻게 다를지 따지기 전에 즉각 느껴지는 감각 때문에 표현될 언어와 느껴지는 감각이 시차 속에서 서로 미끄러졌다.

생산하고 유통을 하던 비즈니스 공간이 갑자기 아무런 관련 없는 디지털 스펙터클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우리 조차도 미지의 공간으로 유체이탈이라도 된 듯했다. 가상공간에 흘러 다니던 각종 이미지를 채집, 조합하여 확대해 놓은 예술가들- 김무무, 김민희, 노상호, 신다혜, 정수정, 최수진 등-의 현수막 작품 때문에 이러한 느낌이 가속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각종 디지털 이미지들에 대해 반응한 예술가들- 송동환, 박신영, 배정윤, 이진아, 콰이, 유형주등-의 디지털 이미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 자체들의 섬세함이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그 작품조차 배경처럼 처리되는 ‘공간의 마술’ 때문에 골목을 걸어가고 경험하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사실 산림동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꿈, 하나의 무대로 제시되었다는 강력한 징후는 을지 판타지아 프로젝트의 오프닝 행사같았던 을지 ‘백일봉(Daydream)’행사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해 떨어진 산림동 골목에서 20여명의 미디어 아티스트, 설치예술가, 뮤지션들이 이 골목을 무대처럼 사용하여 퍼포먼스를 벌였다. 조명과 영상, 음악이 이 골목에 흘러다니고 사람들도 떠밀려 갔다. 산림동이 산림동이 아닌, 그야 말로 '낮에 꾸는 꿈' 호접지몽이었다. 내가 잠시 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장소 특징적인 전시이기는 했지만, 공간적 특성이 작품성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고, 영업활동이 최소화되어 있는 산림동 일대에 드문드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무작위로 흘러 다녀서 공간 자체가 매우 초월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실재의 삶이 일어나고 있는 현재로부터 나 자신이 소외되는 애잔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사라져 가고 있는 일상 공간에 대한 노스텔지어 때문에 역사적으로 구축됐던 감수성이었을까. 장소에 대한 본능스러운 애착때문에 초래된 복고적 감각 말이다. 발터 벤야민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붙들려 있는 자신의 감정을 폴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판화에 이입하면서, 변화의 광풍으로 ‘앞으로 떠밀려가면서도 뒤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듯이, 나도 이 을지로 산림동에 발 길이 잠시 묶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몇 일 뒤 다시 여기에 왔을 때 이 장소에서 내가 발목 잡힌 채, 앞으로 떠밀려간다는 기분보다는, 오히려 발목 잡힌 채 이 골목이라는 미로에 그냥 갇힌 채 빙빙 돌고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 골목안, 과거 창고건물을 새롭게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한 을지아트센터의 ‘을지드라마’전을 보면서 그 의심은 점 더 구체적이 됐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확실히 바깥과 단절되는 분위기를 겪었는데, 마치 길거리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영세한 가내 공장 입구같은 데를 들어가서 철제 계단으로 올라가는 순간 늙은 벽들은 부드러운 청색 천으로 덮혀 주름 잡혀 있었고, 박슬기의 천에 바느질로 작업한 ‘바람 난 사람’이라는 작품을 지나면, 마침내 바깥과 확실하게 구분짓는 공간의 경계를 보여주는 듯한 부적같이 보이는 이주원의 ‘기도하는 손’이란 네온 작품이 얼굴을 내밀었다. 자연으로서 여성의 신체를 그려서 영상으로 재현한 은은의 작품과, 타투를 매개로 한 이석의 영상 설치는 인간의 신체를 페인팅이나 타투를 사용하여 이미지화 한 뒤에 그 이미지를 다시 영상으로 제작한 후 설치하여 마치 이미지를 영상으로 재실재화한 것처럼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이병찬은 폐기물로 산업화의 괴수를 만들어 전시실을 채우고 있었고, 김한샘은 게임 캐랙터를 그림으로 다시 제작하여 액자 속에 넣어서 매우 아날로그적으로 재현했다. 신단비의 ‘윤슬’도 진기종의 ‘프로젝트: 자연모방의 어려움’도 자연의 산물을 이미지화한 다음 그것을 입체적 형태로 재현한 작품을 보여줬다. 을지드라마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이미지를 재형태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들을 창고를 개조한 전시실에 전시를 한 것이다.

‘을지 산수’가 마치 산림동 거리를 블랙박스나 모니터 안에서 집어넣는 방식으로 전시를 기획했다면, ‘을지드라마’는 모니터 안에 갇혀 있던 이미지들을 모니터 바깥으로 끌어낸 듯이 기획했다. 공간의 안과 밖을 뒤집어서 산림동 골목이라는 특정적 장소를 매개로 기획을 하였고, 그 결과 안과 밖의 구분이 흐릿해졌다. 황량한 거리가 아늑한 실내처럼 보이고, 실내 전시 공간은 도시의 에너지가 흘러다니는 곳이 되었다. 공간의 안과 밖이 뒤집어지면서 안과 밖의 경계만 흐릿해진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경험 자체가 하나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 듯해져 시간 자체가 바로 '지금 여기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공간에서 여러 시간을 느낄 수도 있으면서, 또 한 시점에서 여러 순간이 펼쳐져 있는 사물을 볼 수 있어, 여러 순간을 한 덩어리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이 단일화되고 시간이 압출되어 경험이 겹쳐지면서 을지 판타지아는 을지로 산림동일대에 하나의 압축된 가상적 현실로, 예술 프로젝트 형태로 드러났다. 메쉬업(mash-up)이 현실화된 듯 느껴졌다. 그 속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기억의 일부가 현재의 의식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문제는 이렇게 무시간적 공간 속에 소환된 과거가 흐릿하고 애매하여 어떤 새로운 의미나 아이러니를 캐치할 수 있는 여백마저 흐릿해졌다.

이를 두고 김웅기 평론가는 ‘시간을 초월한 겸험과 느낌’이 누적된 과거의 경험과 느낌으로 채워지면서 이전 세대의 스타일만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평했다. 신박하고 야심찬 프로젝트 기획과, 전시되고 설치된 작품들 사이의 아귀가 맞지않아 좀 헐겁게 따로노는 비대칭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하나의 기획이라는 우산 아래서 공존하기에 각각의 작품들 결이 서로 울퉁불퉁 하기도 하고, 작품 간의 높 낮이도, 기온도 편차가 컸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 공공기관이 지원하는 공공예술과 연관된 프로그램 아래에서 제한된 시간과 예산, 무엇보다 ‘맨 땅에 헤딩’으로 일궈낸 노력을 생각하면 울컥하고도 남을 성과다. 미술에 대한 공공적 개입은 그 자체로 새로운 미학적 시도가 되기보다는 미술을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로 평가되기 마련이다.

공공 장소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의 대상이나 미디움으로 되는 장소특징적인 작품이 되고, 그 작품 자체가 하나의 전시가 될 수 있는 프로젝트는 그 자체가 오히려 판타지아가 아닐까 싶다. 산림동에서 벌어진 이 판타지아 프로젝트는 새로운 공공미술의 한계와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지금까지 미술적 시도의 작지만 소중한 결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출발하기 위해 출발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는 어디서든 출발해야만 한다.

어쨌건 과거 한국의 산업을 이끌었던 을지로의 욕망과 현재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을지로의 욕망을 뒤섞어 미래의 욕망을 통찰해 보는 전시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삶과 예술,도시와 예술의 관계성을 근본적으로 생각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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