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40) 탐관오리의 영원한 대명사

화신의 이름은 훗날 부패한 관리의 전형이 되었다.

화신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부패 사범이었다. 그가 보통의 탐관오리와 다른 점은 황제의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조정의 재정권을 장악했고 군권과 인사권도 상당 부분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이다. 화신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치밀한 경영을 통해 조정 안팎에 거대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때문에, 이런 인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단호한 수완이 필요했다. 조금이라도 미흡한 부분이 있을 경우는, 예측할 수 없는 화를 부르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청 가경(嘉慶) 원년(1796) 정월 초하루, 태화전(太和殿)에서는 성대한 수수대전(授受大典)이 거행되었다. 고종이 황제의 옥새를 아들인 과염(顆琰)에게 전수하는 의식이었다. 과염은 정식으로 즉위함으로써 인종(仁宗)이 되었고 고종은 태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은 태상황의 직분으로 정치에 훈수를 두면서 조정의 대사를 직접 처리하는 등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항상 대전에 나와 문무백관들의 하례를 받았고 인종은 그를 보좌하는 역할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종이 죽고 친정을 펼치게 된 인종은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장장 20여 년간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기대신(軍機大臣) 화신을 체포하여 투옥 시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 버렸다.

화신(和珅)(초상화:1750년 7월 1일 청나라 청나라 북경 서성  출생), 권력을 악용하여 사욕을 채우다/ⓒ위키백과
화신(和珅)(초상화:1750년 7월 1일 청나라 청나라 북경 서성 출생), 권력을 악용하여 사욕을 채우다/ⓒ위키백과

화신은 성이 유호록(鈕祜祿)씨로 만주 정홍기(正紅旗.-만주의 여덟 귀족 중 한 갈래)의 귀족이었다. 교위(校尉)로 관직을 처음 시작한 그는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가 외모가 출중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매사에 일 처리가 깔끔했다. 이런 장점들 덕분에 고종 건륭제(乾隆帝)의 총애를 받게 된 그는 승급을 거듭했고 조정 내에서 겸직하는 관직이 한둘이 아니었다. 건륭 40년(1775)에서 가경 3년(1798)까지 24년 동안 그는 내무부 대신과  호부상서, 병부상서, 문화전(文華殿) 대학사, 경사 보군통령, 군기대신 등을 지냈고, 그 가운데 몇 가지를 겸직하기도 했다. 또 장자 풍신은덕(豊紳殷德)이 고종의 열 번째 딸 화효고륜(和孝固倫)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써 황실의 인척이 되었다. 이리하여 화신은 건륭 왕조 최고의 대신으로서 조야를 마음대로 뒤흔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직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전횡을 일삼으면서 정사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했다. 그는 각 성에 공문을 내려 주장을 올릴 때마다 군기처에 그 사본을 제출할 것을 요구해, 목록을 사전에 살핀 후에 선별적으로 황제에게 올리곤 했다. 또 사당을 결성하여 자기에게 영합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황제에게 무고하여 피해를 주었다.

화신은 청대 중엽 관리들 사이에 횡행했던 뇌물수수 관행의 원조였다. 당시 조정 안팎의 문신과 무장들 사이에 공금을 횡령하고 뇌물을 받는 기풍이 극성하면서 심한 경우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달하는 은냥이 새어나갔는데, 그 흐름을 추적해보면 으레 화신에 닿아 있었다. 인종 가경 초년, 천(川 ), 초(楚), 섬(陝) 일대의 백련교(白蓮敎.-송, 원, 명나라에 걸쳐 성행하였던 신흥종교)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수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하여 군량을 착복했을 때도 그 배후에는 화신이 버티고 있었다. 화신 자신은 더욱 대담하게 재물을 챙겨, 관직 생활 20여 년 만에 거둬들인 재물이 백은 2억 냥에 달했다.

화신은 매사에 치밀한 계산에 따라 행동했다. 고종이 과염을 태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화신은 저위(儲位), 조서가 공표되기 하루 전에 과염에게 여의를 하나 선물했다. 과염이 황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 순전 자기 덕이었음을 알리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화신은 이를 빌미로 다음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할 심산이었고, 이런 무언의 압력 때문에, 과염은 크게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고종이 태상황의 신분으로 정사에 관여하는 동안 화신은 실질적으로 고종의 뜻을 결정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전횡을 일삼아 조정의 문신과 무장들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심지어 곧 황위를 계승할 과염조차도 그를 두려워했다. 가경 3년(1798) 봄, 인종은 겨울에 대열(大閱.-임금이 몸소 행하는 군대 사열) 전례를 거행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화신이 고종을 대신하여 이와 상반되는 명령을 내리면서 말했다.

“현재 천동의 백련교도들이 소탕되고 있긴 하지만 건예영(健銳營)과 화기영(火器營)의 관군이 철수하지 않는 상태라 금년에는 대열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적절치 못합니다.”

이런 화신의 행동은 황제가 결정한 일을 태상황은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지만, 태상황이 결정한 일을 황제는 거부할 수 없다는 기이한 관례를 남겼다. 그러나 태상황의 결정은 대부분 화신이 종용한 결과였다. 한번은 연회 석상에서 화신이 태복(太僕)의 말을 줄일 것을, 주청했다. 이는 실제로 황제의 승마와 어가 행차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 인종이 좋아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인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겠구나!”

인종이 태상황에게 보고를 올릴 때도 반드시 화신을 통해 전달해야 했고, 태상황과 화신 두 사람 사이에는 못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가 유지됐다. 그러나 인종도 상당한 지략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화신의 행위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눈에 띄게 대응하는 일도 없이 그저 화신이 하는 대로 방관하며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화신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화신이 황제의 뜻을 주청할, 경우에도 그는 ‘태상황께서 살아 계신 데 내가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고 애써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화신의 전횡에 대한 인종의 지혜로운 대응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물론 인종은 몰래 조금씩 화신의 권력을 축소 시키면서 태상황 고종으로부터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다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가경 4년(1799) 정월 초사흘, 고종 건륭제는 마침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인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정월 초나흘 날, 인종은 화신과 병부상서 복장안(福長安)에게 주야로 영전을 지키되 절대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운신의 자유를 박탈당한 화신은 군기대신과 구문제독(九門提督)의 직위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어서 인종은 명령을 내려 조정의 대신들이 하나같이 부패하여 백련교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적을 부풀려 엄청난 군량을 착복하고 이를 양병(養兵)에 쓰지 않고 대신들의 사고(私庫)를 채움으로써 국가재정에 타격을 입히고 나라를 욕되게 했다고 지적하면서, 어떻게 나라의 체면과 위신을 세울 수 있느냐고 다그쳤다. 아울러 각부 대신들에게 모든 부패행위를 철저히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유지가 하달되자 급사중 왕염손(王念孫) 등은 황제가 화신을 징계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상소를 올려 화신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인종은 화신을 파면하고 옥에 가두는 동시에 그의 스무 가지 죄상을 일일이 들춰냈다.

화신이 체포된 직후 그의 집에서는 대량의 금은과 보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액수가 당시 조정의 수년 치 재정 수입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화신의 엄청난 죄상에 대해 인종은 능지(凌遲)의 형을 내릴 생각이었으나 여동생인 화효공주가 눈물로 호소하고 동고(董誥)와 유용(劉墉) 등의 대신들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화신에게 옥중에서 자결하도록 명령하고 그의 가산을 전부 몰수하여 종실로 귀속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화신이 처형되자 가깝게 지냈던 측근들은 혹시 자신도 연루되어 처형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일부 대신들은 자진해서 화신의 잔당을 추궁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은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모든 죄는 화신, 한 사람에게 있다는 조서를 내려서, 지난 죄를 묻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화신을 제거하는 과정에는 별다른 저항이나 불상사가 없었지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는 민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치지 않았고 여러 해에 걸친 경영을 통해 전국에 화신의 측근들이 두루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잘못 처리했다가는 연못을 살리기 위해 물고기를 다 죽이고 숲을 살리기 위해 새를 내쫓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봉건 왕조시대의 조정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그 속에서 소리소문없이 화신을 제거한 인종의 행동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없는 쾌거(快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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