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과 한홍구의 히틀러 변(辯)에 부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정신줄 놓지 말라, 히틀러도 '선출된 권력'이었다"라는 글을 중앙일보(2020.12.30.)에 올렸더니,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진중권을 옹호하고 나섰다(오마이뉴스, “문재인 정부, 아직 임기 500여일이 남았다”, 2021,1,10).

사진출처: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2017.3.13)
사진출처: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2017.3.13)

한홍구의 말에 따르면, 진중권이 히틀러 운운한 것은 현 정부를 공격하고자 한 의도도 아니었는데, 친(親)정부 인사들이 과민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진중권이 되는 말 안 되는 말 가리지 않고, 한편으로 조국과 추미애를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윤석열을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민주투사인 양 옹호하는 일은 없었던 것처럼 시침 딱 떼고, ‘진중권이 현 정부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홍구는 말한다.

그런데 딱히 그런 것은 아니다. 진중권이 박정희나 전두환을 예로 들지 않고 히틀러를 들고나온 것부터가 이들 독재 정부를 다소간 눈앞에서 가리고, 그래서 내심 현 정부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멀리 히틀러까지 왜 들먹이나! 박정희도, 전두환도 다 선출된 권력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민초의 바람을 저버렸던 것이다. 사실 선출된 권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임명된 권력, 검사, 판사도 기준이 없이 일탈하고 있다. 무슨 알량한 법 지식이 없는 이가 상식에 견주어 봐도 아닌 것이, 정신줄 놓고 있는 이가 널 뛰듯 한다. 대한민국이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남의 집 히틀러를 소환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권력을 휘두르는 이가 민초의 바람을 저버렸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것은 선출이냐 임명이냐를 막론한다. 나아가 여기서 얻는 교훈이 있어야 한다. 선출 혹은 임명만 하고 가만 놔둬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권력이 일탈할 때는 언제든 견제,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을 명색이 나라의 주인인 민초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구나!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간, 쓸개까지 다 내주는 것이 아니구나! 선출된 권력이 일탈하는 것을 보고도 이런 걸 깨닫지 못한다면, 평생 고생을 해도 싼 것이 된다.

그런데 히틀러와 박정희는 딱히 닮은 것만도 아니다. 민초의 촉망을 받으며 선출된 것은 같은데, 그 다음이 다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해서 욕을 얻어먹지만, 같은 독일인으로터 증오를 받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냥 히틀러의 행위에 대해서 독일인이 미안해하고 사과를 할 뿐이다. 다수 독일인의 지지를 받았던 히틀러는 동족이 아니라, 적군(즉 영, 프, 미 등 연합군)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지만 지금도 독일인이 히틀러를 증오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히려 승전의 연합국에 대한 증오가 더 컸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승전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29년 세계경제공황이 일어났는데, 경제가 바닥을 치는 마당에도 독일은 전비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히틀러의 독재는 그 전비배상금에 대한 지불유예(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대의는 한마음으로 살 길을 찾아 나선 독일 민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다시 강조하자면, 히틀러는 동족의 증오 대상이 아니었고, 동족이 아니라 적국에 의해 제거되었다.

히틀러 개인과 무관하게 이미 독일의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 것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총결산 베르사이유조약(1919)이 맺어지기 직전, 독일에게 전비배상금을 요구하면 안 된다고 연합국을 설득하려 했다. 배상금을 요구하면 반드시 독일은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총명한 케인즈는 예견했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거울삼아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연합국은 패전의 독일에 대해 그 같은 천문학적 액수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독일 부흥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독재와 군국주의의 폐해는 그런 점에서 장기적으로 연합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군사혁명으로 권력을 잡았던 박정희는 히틀러와 달랐다. 그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대통령 후보로 섰을 때, 내 어릴 적 기억이 맞다면, 90% 이상의 지지표를 얻었다. 그 후 자신의 권력 야욕을 위해서 동족을 독재의 희생물로 삼았고, 결국 동족, 그것도 바로 측근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렇듯, “히틀러도 선출된 권력이었다”라고만 할 것이 아니다. 같이 선출된 권럭이지만 히틀러와 박정희는 달랐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독재를 위한 독재를 했고, 민초가 가진 처벌, 견제의 권력을 무력화했다. ‘국민개헌발안권’ 빼앗아 없애서 민초를 멍머구리로 만들어버린 것이 유신정권의 박정희였다. 그 독재의 유산은 지금까지 남아서, 허울뿐인 ‘주권자’ 민초는 공직자 권력의 일탈을 견제도 처벌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추미애와 윤석열의 갈등이 아니라 개인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낸 제도의 개혁과 반개혁의 불협화음이다.

진중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 역시 “‘선출된 권력’이었지만 선출되지 않은 9명의 헌법재판관들에게 탄핵당했다. 그 일이 그렇게도 부당하다면, 지금이라도 감옥에 있는 그를 데려다 부정취득한(?) 정권을 반납해야 한다”는 것이 진중권의 지론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진중권의 사고의 협소함이 있다. 박근혜를 탄핵한 것이 헌법재판관 관료 9명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박근혜를 탄핵한 것은 거대한 민심이었고, 그 민심의 발로는 촛불혁명이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도 지금 정부를 ‘촛불혁명정부’라고 하지, ‘9명 헌법재판관에 의해 탄생된 정부’라고 하지 않는다.

박근혜의 탄핵이 9명의 헌법재판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진중권의 머리 속에는 아예 민초라는 존재가 들어가 박혀있지 않다. 정치를 대통령과 재판관들만 하는 줄로 아는 것이다. 민초를 허깨비로 아는 것이다. 박근혜 탄핵 당시 민심은 폭동 전야였고, 온갖 국정이 마비 상태에 들어가 있었던 사실을 진중권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바깥에서 민초가 아우성을 쳐대도 이미 굳을 대로 굳어버린 그의 머릿속에 민심, 민주가 비집고 들어갈 틈새조차 없는 것이 틀림없다.

한홍구가 나서서 중권의 ‘히틀러 변(辯)’이 현 정부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고 진중권을 변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가 500일 남긴 대통령을 위해 장문의 글을 쓴 것도 진중권의 “9명 헌법재판관에 의한 박근혜 탄핵론”과 같은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위정자들이 정치를 다 하는 줄로 한홍구가 여전히 착각하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홍구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경원은 연세대 강의자료 비슷한 것이 변호사 시험에 나왔다고 하면서, 관련자를 처벌해야 한단다. 그런데 이런 사태의 “주무(主務) 부처가 또 법무부다. 제발, 일 좀 제대로 하자”라고 했단다(청정뉴스, 2021.1.10.). ‘또’라는 표현을 쓴 거 보면, 다른 일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동부구치소에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1명 나왔다면, 그것은 법무부 장관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법무부 장관하고 대통령 빼고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검사도 판사도 엉망으로 수사하고 엉망으로 재판해도 책임을 안 진다. 그런데 일이 터지면, 다 법무부 장관 탓이고 대통령 탓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보기에 편리한 것 같지만, 스스로를 양아치로 만드는 것이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벗으려 하는 순간 자신의 권리까지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권력이 각 기관으로 분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초가 스스로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탓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권력을 분산해서 다 같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남에게 다 맡겨놓고, 그 선처만 바라고 앉아있는 것이 바로 주인 아닌 양아치이다.

양아치를 면하려면, 한홍구는 달통한 도인같이 앉아서 장문의 글로 500일 남은 위정자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라. 기왕에 훈수를 뜨려면, 부족해도 하려고 하는 이들이 아니라, 독재의 제도적 잔재의 청산을 온몸으로 막아서는 검새와 판새 나부랭이들에게 “어떻게 해야하나”를 적어보내도록 하시고, 지금도 공수처가 설치 될까봐 노심초사하여 죽으라 발목 잡고 늘어지는 국힘당에게 “어떻게 해야하나?”를 적어보내도록 하시라.

그들 방해와 협잡 때문에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500일 남긴 위정자가 마음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다른 이가 아니라 한홍구 자신을 포함한 민초들이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나”를 고민하고 적어 내도록 하시라. 정치의 중심에는 위정자가 아니라 민초가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촛불혁명을 이루어낸 대한의 민초들은 이제 스스로 발견하고 만들어갈 것이고, 위정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촛불혁명은 앉아서 남에게 하는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침묵으로 이룬 것이고, 앉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발로 이룬 것이다. 위정자의 부족함을 메꾸려고 민초는 엄동설한도 마다하지 않고 몸으로 발로 나서서 촛불을 들었다.

한 술에 배 부르랴! 그것은 한 번이 아니라 자꾸만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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