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제(영남총괄본부장)
                                                     박유제(영남총괄본부장)

‘민중의 벗’ 고(故) 백기완 선생이 영면하셨다. 창원에도 분향소가 마련돼 여야 정치권에서부터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일반시민들의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백기완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대통령선거 때였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후보로 추대돼 대선에 출마했을 때, 대학생이던 나는 선생의 지역 대선캠프 학생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부릅뜬 눈, 휘날리는 머리카락, 우렁찬 목소리, 그러면서 온화하고 포용적이며 논리적인 대화...20대의 나에게 선생은 어느 하나 존경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리어카’에 선생의 선거홍보물을 설치한 채 후배들과 함께 재래시장을 휘젓고 다녔다. 휴대용 확성기로 구호를 외치며 선거운동을 했다. 그때 외쳤던 구호가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였다.

두 번째 인연도 학교 캠퍼스였다. 학교 축제인 ‘오월제’ 행사 첫날 선생이 초청연설을 해주셨고, 나는 선생의 연설 중간 중간에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휴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그만큼 선생의 연설은 강렬했고 당신 스스로도 힘이 부칠 정도였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선생을 만난 것은 서울 자택에서였다. 학교 졸업 후 시사월간지 정치부 기자로 입사했던 나는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사진기자와 함께 한옥에 복층 구조의 자택을 방문, 소주 대병을 사들고 월담을 시도했다. 그러자 비서가 나와 문을 열어줬고, 꾀죄죄한 한복 차림의 선생을 마주하고 앉았다.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선생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소주 사가지고 오지 않았으면 문 안 열어줬다‘고.

그 후에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없다. 신문으로, 방송으로 각종 집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던 ‘백발의 호랑이’는 나의 일상 속에서 무덤덤해졌다.

그런데 설 연휴가 끝나고 첫 월요일인 15일 이른 아침, 필자가 소속돼 있는 <뉴스프리존> 톱기사로 선생의 영면 소식을 접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노동자 농민의 ‘벗’이었고 통일운동에 앞장서다 돌아가신 선생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7일 창원시 중심가에 꾸려진 분향소를 과거의 ‘동지’들과 함께 찾아 명복을 빈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에게 선생은 많은 민주인사 중의 한 분이 아니었다. 수많은 원로인사들이 계셨지만, 나에게 ‘백기완’은 개인적으로 한 줄기 빛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칡처럼 단단한 뿌리로, 대쪽 같은 줄기로, 늘푸른 솔잎으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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