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존재의 집’같은 시적언어 ‘그림집’으로 풀어내

의탁할 수 있는 고향집 같은 장소... 치유의 공간이 되다

[서울=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시각언어는 인상과 더불어 구조를 읽어내야 한다. 자칫 구조인 형식을 모르면 무엇을 말하는지 내막을 알수가 없다. 형식은 곧 내용이라는 언어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작가의 시각언어를 읽어내는 것이 미술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현대미술에서 작가들은 자기만의 시각언어를 가져야 한다. 그것도 기존과 다른 대안적 시각언어다. 우리가 장민숙 작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갤러리 마리 개인전(3월 19일까지가‘보이지 않는 풍경’)까지 3번의 전시를 통해 한국작가들에게선 보기드문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구축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초기작품들을 보자. 서양의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집풍경이다. 어린시절 동화책에서 보던 모습이다. 크레용을 들고 집은 그릴땐 흔히 그렇게 했다. 작가에게 집이라는 이미지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아니 자신만의 존재의 집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심리학을 전공하게 된다. 길게 돌아 다시 캔버스앞에 섰다. 그런 세월이 20여년이다. 확고한 자신만의 집을 그림으로 짓고 지었다. 전공도 안했는데 왠 그림이냐,호기를 부리는 것이냐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 강할수록 집은 더욱 견고해 졌다. 누구에게도 ‘그림 집짓기’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어느순간부터 집은 네모가 되고 색이 됐다. 자신의 존재의 집인 ‘그림집’을 그리게 된 것이다.

네모의 색판들에선 빛이 분출되는 듯하다. 작가의 감성의 언어가 용트림을 하고 있다. 네모틀마저 아련하다. 어느 동료 작가는 묘한 기분이 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범상치 않다는 얘기다. 누구는 마크 로스코,스텐리 휘트니,폴 클레의 작품을 닮았다고 하지만 작가의 시각언어를 제대로 일지 못한 소치다. 추상에 이르는 확실한 프로세스가 있는 작가라는 점을 주시하면 작가의 시각언어가 비로서 읽혀진다. 오히려 멀게 돌아서 온 길로 인해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언어를 획득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이라 했지만 장민숙작가에겐 ‘그림이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의 주된 문제는 '고향상실’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는 고향이나 집과도 같은 장소를 상실하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체유령처럼 떠도는 존재로 봤다. 고향이나 집 같은 장소를 찾아주는 것이 과제가 됐다. 언어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시적 언어다. 울적할 때 찾게되는 어머니 너른 품 같은 객관적으론 측량할 수 없는 경험이 생성되는 곳이다.

과학적 언어는 모든 사물을 물질화시켜 수단화하고 복속시킨다. 반면 시적언어는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고정된 의미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한다. 바로 이 시적언어가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에게 ‘있을 곳’을 마련해 준다. 그것에 자신의 존재를 초연히 내맡김으로서 자기 자신이 되며, 동시에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을 되찾음으로 인해 ‘치유’가 된다.

장민숙 작가에게 그림은 시적언어다. 작업을 통해 존재의 집을 짓고 그곳에 내맡김으로서 스스로가 치유가 되고 있다. 보는 이도 같은 맥락에서 치유가 된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