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수청 설치의 핵심은 인적 거취가 아니라 권력의 구조적 분산이다

중수청(중대범죄수사청) 설치를 꼭 추진해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중수청 설치에 반대하는 이들의 항변 자체에서 드러난다. 검찰총장 윤석열, 공수처장 김진욱, 또 가짜뉴스가 하도 많으니, 사실이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떠돌아다니는 말에 따르면,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이 중수청 설치에 부정적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법치’에 빗대어 ‘민주’를 배반한 윤석열

 
사진출처:  서울경제 2020.12.2
사진출처: 서울경제 2020.12.2

윤석열이 작심하고 했다는 국민일보와의 대담에서, 그는 “여권이 중대범죄수사청 신설을 중심으로 추진하는 이른바 ‘검수완박’ 입법을 권력형 비리와 민생 피해를 부르는 ‘법치 말살’”로 규정하고, 또 “단순히 검찰 조직이 아니라 70여년 형사사법 시스템을 파괴하는 졸속 입법”이라며 “직(職)을 걸어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100번이라도 걸겠다”고 말했단다. 또 자신은 “20년 넘게 권력 비리 수사에 몸담았기에 말할 수 있다”고 했단다.(국민일보, 3.2.)

윤석열의 이 같은 발언은 네 가지 치명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윤석열이 ‘법치 말살’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 오류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법치주의’인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그 뜻은 지금 그가 총장으로 있는 검찰조직이 모든 것 위에 군립림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엄연한 ‘법치’에 따라 민초가 뽑아 선출한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도 자신이 거느린 검찰의 ‘법치’ 하에 놓여있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권력형 비리’의 개념은 바로 그가 신념으로 갖는 검찰 중심의 ‘법치주의’ 개념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법치주의’ 자체가 만능이 아니다. 그 ‘법’ 위에 ‘민(民)’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이지 ’법치국가‘가 아니다. 이 사실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민주는 민초가 주권을 갖는 것이고, 그 민(民)은 현행 ‘법’ 위에 군림한다. 잘못된 법을 강행하고 합법적 절차에 의해 고치지 않을 때는 민초는 혁명을 일으켜서 고칠 권리가 있다. 프랑스 시민혁명이 그 예이다. 그 때 시민은 혁명 이후에 새 법을 만들었다.

한국의 민생 피해는 윤석열이 말하는 이른바 현정권의 ‘법치 말살’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민의 뜻을 무시해온 바로 그 잘못된 ‘법치주의’에서 수도 없이 발생해온 것이었다. 그 ‘법치’의 이름으로 있는 법까지 왜곡하며, 민생을 괴롭혀왔던 검찰조직은 그 핵심에 있다. ‘법’의 이름으로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검찰 조직을 견제하려 하는 것이 중수청이다.

둘째, 윤석열은 중수청 설치를 “70여년 형사사법 시스템”을 파괴하는 졸속 입법으로 규정했다. 아니다. 70년 동안 고치고 싶은 것을 고치지 못하여 응어리져 있던 민심이 이번 정권 들어서 햇빛 아래 고개를 내밀려 하고 있다. 그것은 하루 이틀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윤석열의 말을 거꾸로 까뒤집으면, 70년 장구한 세월동안 묵은 적폐의 억압으로 눌려만 있던 민심이 대세를 이루려 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윤석열은 자신을 대단한 봉건주군 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직(職)을 걸어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100번이라도 걸겠다”고 한 것이 그러하다. 이 말은 자신이 100번 목숨을 걸면 민초의 뜻도 거스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그 내심을 반증한다. 오히려 어떤 사유로 인해서 중수청을 설치하면 안되는 것인지를 설득력있게 개진하든지, 아니면 국민투표를 해서 그 뜻을 물어봐야 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목숨을 걸고 반대하겠다고 했을 뿐이다. 이 말은 윤석열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이 땅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스스로의 독선을 여지없이 까발린다. 원래 윤석열은 자신의 생각 이외의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라고 믿으므로, 이른바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법치주의’가 만능이기 때문에, 민의(民意)를 묻는 투표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 없는 것이다. 윤석열은 대한민국의 한 한 민초가 아니라, 70년 묵은 적폐의 거대 검찰조직의 수장, 붕건적 주군일 뿐이다.

그가 계속 내뱉는 말은 자신의 사고의 한계를 더욱 명백하게 한다. "내가 밉다고 국민 이익을 인질삼나“, "내 밑에서 검사 다 빼가도 좋다… 검찰 범죄 수사 역량만 살리자"(중앙일보, 3.3) 등의 발언이 그러하다. 윤석열은 중수처 설치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인적(人的) 감정이나 구성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적 분산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은 중수청은 설치를 개인 윤석열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것은 적어도 해방후 70년 간 이루지 못했던 검찰 왕국의 타파를 위한 것일 뿐이고 마침 윤석열이 그 선두에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인적 차원의 이 같은 윤석열의 이해방식은 권력구조적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가 ”자기 휘하에 다 빼가도 되는데, 수사권 기소권 분산은 절대 안 된다“고 한 발언이 그 증거이다. 여기서도 윤석열은 국가의 공적 검찰조직을 자신의 인적, 사적 지배구조 하에 있는 것으로, 또 검찰들을 자기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자신도 그 검찰의 일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오해는 윤석열 자신의 눈을 가려서, 중수청 설치의 핵심이 권력 분산이라는 핵심조차 이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시대착오적으로 권력을 분산하지 말자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넷째, 윤석열은 “20년 넘게 권력 비리 수사에 몸담았기에 말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그 말을 다시 까뒤집으면, 윤석열은 20년 넘게 지금 검찰조직이 여지없이 노정하는 적폐에 고스란히 물들어 왔고, 그래서 그 조직 자체에 대한 반성 의식조차 결여하고 있는 형편에 처해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이란 누구나 해오던 대로 하기를 원한다. 특히 타인과의 권력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을 때는 결코 그 기독권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지상정이고, 윤석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한 세기를 점철해온 기득권 보수의 숨은 조직과 그 앞잡이로 이용당하는 윤석열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거대 조직과 금력을 가지고 있으나 드러나지 않는다. 거기에 비하면 윤석열은 당장에 개인의 거취가 달려있다. 권력의 추이는 고사하고 당장에 사기 혐의에 연루된 처와 장모 문제가 불거져있는 판이기 때문이다.

공수처장 김진욱의 무책임한 발언

갓 공수처장으로 임명된 김진욱이 중수청 설치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가 “중수청이 없어야 속도가 난다”는 것이란다. 여기서 김진윽은 공수처장이면서 공수처 설치의 맥락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공수처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에 대한 상식조차 갖지 못한 채 처장의 자리에 임했다는 말이다.

그저 전에 없던 공수처장 된 것만 대견한 것이었음에 틀립없다. 그리고 이미 관료주의 작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수청이 없어야 속도가 난다”는 발언이 그러하다. ‘속도’룰 낸다는 말을 곱씹어보면, 이미 그 포괄의 범위나 공정성에 대한 고려가 배제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김진욱 자신은 공수처장이 아니라 대통령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무책임한 발언을 하고 있다. 고작 23명의 검사를 두고 출범하려 하는 공수처는 검찰조직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공수처가 감당하지 못할 검찰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기구로서 중수청의 출범을 반대하는 김진욱은 이미 검찰의 비리를 견제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음을 실토했다.

공수처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진 기구로서 출발했다. 여러 가지 염려가 있었다. 한편으로 공수처 자체가 제2 검찰조직이 될 것이라든가, 다른 한편으로는 고위공직자를 수사하는 막강한 권력이 또 하나의 권력기구를 탄생시킬 것이라든가 하는 염려였다. 그런데 후자의 염려는 고작 23명의 검사로 출범하는 공수처에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고, 거대 검찰조직의 애완견 정도가 될 전망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공수처장 김진욱이 중수청 설치에 반대 의견을 피력하면서 그런 사실을 반증했다.

만일 김진욱이 걸찰 등 고위공직자의 비리를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공정하게 다루려고 마음먹었다면, 절대로 ‘속도’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23명 검사를 거느리고 아무리 속도를 내봐야 한계가 있다. 김진욱이 내심으로 공수처의 본래 목적을 성실하게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이 같은 인적 자원의 한계를 절감하고 또 다른 기구의 협조를 쌍수로 환영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진욱은 그러지 않았다. 공수처는 임시방편일 뿐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을 그는 꿈에도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그는 원래 관료주의자로서, 공수처를 기능이 아니라, 권위적 기구로서 겉으로 형식만 갖추려 했던 것이다. 왜 공수처가 출범하게 되었는지, 그 공수처의 한계는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검찰개혁은 추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는 갖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공수처가 검찰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 자리매김하고, 그 역량의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공수처 외의 다른 기구는 생기면 안 되는 것이라는 권위적 사고에 머물렀음이 중수청 설치추진에 반대하는 변(辯)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중수청 설치에 반대하는 윤석열은 검찰이 권력을 잡아야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 같이 중수청 추진에 반대하는 김진욱은 공수처가 검찰의 비리를 견제하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듯 윤석열과 김진욱은 닮은 점이 있다.

비리와 부패로 가득한 검찰 조직의 현실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 채, 검찰조직이 건재해야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해서 민주정치를 지킬 수가 있다고 믿는 윤석열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편향, 확증편향적인 증세) 상태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민초들의 눈에 뻔히 보이는 그 검찰의 가짜증거 조작, 선택적 집중수사 등 작태의 온상이거꾸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김진욱도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이 윤석열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런 것이 분명하다. 공수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공수처가 앞으로 얼마만큼한 역량을 가지고 검찰의 비리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의 유보

떠돌아다니는 말에 따르면,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이 중수청 설치에 반대, 아니면 적어도 유보적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중수청을 설치의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란다. 이 말만 가지고서는 그가 반대한 것인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다.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했으니, 의도만 괜찮다면 중수청을 설치해도 좋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박준영이 중수청 설치 ‘의도’를 가지고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자신이 지금껏 직접 해결하면서 겪어왔을 그 검찰의 적폐를 결과적으로 방관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의도’와 ‘권력구조 개혁’은 서로 맞물리는 항목이 아니다. 그 ‘의도’란 주관적 이해일 뿐으로, 진실한 의도는 알아내기가 어렵다. 또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나쁜 의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 나쁜 의도를 가진 자라도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곳에서는 그 나쁜 짓을 효과적으로 하기가 어렵다. 권력의 집중은 나쁜 의도가 관철될 수 있는 주효한 공간을 제공한다. 중수청 설치는 권력의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노리는 것이므로, ‘나쁜 의도’를 가젔다고 해도 그 실천의 기회가 더 줄어들게 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수청은 검찰조직의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국가기관일 뿐, 특정 권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제도적 차원의 문제를 두고서 오히려 특정인 혹은 소수의 ‘의도’ 운운하고 선문답하고 있다가는 펑생 빌어먹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된다.

윤석열을 카리스마의 봉건주군 같이 띄우는 언론

권력을 개인 ‘리더싑’의 전용물처럼 생각하는 것인데, 그 한 상징이 윤석열이다. 좋게 말하면 ‘리더쉽’인데, 나쁘게 말하면 ‘봉건적인 주군 사상’ 쯤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윤석열 자신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그를 ‘카리스마’적 인물인 것처럼 띄우려하는 언론들은 그가 출근하고 점심밥 먹으려고 가는 모습들을 사진으로 찍어 지면에 싣는다. 뉴스를 전달하는 방식이 어떤 민주적 원리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적 거취를 중심으로 보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정서가 바로 윤석열 점심밥 먹으러 가는 사진, 또 아주 권위적 모습으로 반쯤 뒤로 제껴서 승용차를 타고 검찰청사로 출근 아니면 퇴근하는 모습을 싣는다. 한 나라 대통령보다도 더 귄위적이고 여유있는 모습을 온 민초들 앞에 연출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인간의 편견 가운데 ‘극장의 우상’이 있다. 잘 알려진 인물이 말하면, 그것을 그냥 반성없이 곧이듣는 현상이다. 누구의 이름을 통해서든지, 인물의 평가에 초점을 두고 제도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세상에 믿을 놈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 구조적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중수청이 필요한 기관인지를 판단해야 하며, 그 판단의 준거는 권력의 분산이 되어야 한다. 집중된 권력은 필히 독재를 초래하고 봉건적 주군의 허상만을 키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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