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통]

용소무애(用少務隘)

적으면 협소한 지역을 택한다.

‘용중무이(用衆務易)’와 상대되는 말로, 역시 ‘오자병법’ ‘응변(應變)’에 나온다.

소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비좁은 곳에서 적과 싸우려 한다.

‘백전기법’에서는 “적의 수가 많으면 어두워졌을 때나, 무성한 풀숲에 복병을 숨기거나, 계곡 입구의 좁은 길을 막고 적을 공격해야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이 책략은 고대 전투에서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기는 ‘이소승다(以少勝多)’의 중요한 원칙이었다.

일반적으로 산악이나 밀림, 깊은 늪지대나 험한 계곡에서는 대부대가 이동하거나 작전을 펼치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소부대는 조용히 전열을 배치할 수 있다. 전쟁사를 통해 훌륭하게 입증되었듯이,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적을 맞아 사울 때는 강공으로 승리하기가 힘들며 가장 좋은 방법은 은폐할 수 있는 험한 지형을 선택, 매복하거나 차단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유효적절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또 기습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

‘북사(北史)’ ‘주태조본기(周太祖本紀)’에 실린 경우를 보자.

537년, 우문태(宇文泰)가 위곡(渭曲)에서 동위 고환(高歡)의 군대를 맞아 격파한 전투가 바로 ‘용소무애’의 군사 원칙을 체현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병력 면에서 고한은 2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우문태의 군대는 1만이 채 안 되었다. 우문태는 엄청나게 많은 군대를 상대하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여러, 장수들은 중과부적이니만치 고환이 재차 서쪽으로 전진해오기를 기다렸다가 출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우문태는 만약 고환이 장안으로 진격하게 되면 민심이 크게 동요되어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적이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로한 틈을 타 즉시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3일분의 식량만 지니게 한 채 위수(渭水)를 건너 사원(沙苑.-지금의 산서성 고릉현)으로 향했다. 그리고 고환과 60 리 떨어진 곳에다 진을 쳤다. 우문태는 부하 장수 이필(李弼)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위곡에서 ‘동서로 배수의 진을 치고’병사들을 갈대숲에 숨겨 북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공격하도록 조치했다.

밤이 되자 고환의 군대가 도착했다. 고한은 우문태가 직접 군을 거느리고 나오는 것을 보고 결전 태세를 갖추는 한편, 우문태가 이끄는 서위의 군대가 수적으로 적은 것을 보고 곧장 진격해 들어왔다. 쌍방이 뒤엉켜 싸우려는 찰라 우문태는 북을 울려 갈대숲에 숨어 있던 병사들에게 공격 신호를 보냈다. 갈대숲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장수 우근(于謹)과 이필이 각기 횡으로 공격을 가하여 고환 군대의 허리 쪽을 잘랐다.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낸 채 고환은 더, 이상 싸울 기력을 잃고 그날 밤으로 강을 건너 동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고환은 정예군 8만을 잃었다.

우문태가 위곡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때 사용한 모략이 바로 ‘용소무애’(또는 ‘과군무애(寡軍務隘))’였다.

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