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55) 서생 학자가 개국 황제가 못 되는 이유

고대 중국 역사는 남방에 文人, 북방에 皇帝가 많이 난다는 말이 있다.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 이후로 중국의 시인이나 문인, 화가들은 대부분 강남에서 배출되어 강남재자(江南才子)라는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이는 고대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중국 현대문학사를 장식하고 있는 노신(魯迅)이나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파금(巴金), 노사(老舍) 등 유명 작가들의 절대다수가 남방 출신이다.

또 재미있는 것은 봉건 황제들이 거의 북방에서 났다는 사실이다. 시황제(始皇帝-중국 최초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인 진 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나 한 고조 유방(劉邦)은 패현 풍읍 사람이었고, 동한의 개국 황제 유수(劉秀)는 남양 채양 사람이었으며,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하남, 낙양의 군인 집안 출신이었다. 원의 칭기즈칸과 세조 쿠빌라이는 몽골족이니, 두말할 것도 없고,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도 호주 종리현 사람으로 북방출신 이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의 통치자들도 멀리 북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중국 역대의 개국 황제들은 거의 전부 북방 출신인 데다가 그 출신지도 대부분 운하 양안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랫동안 북방 지역은 중국 정치와 문화의 중심인 동시에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용감하고 호전적이라 전쟁을 통한 왕조의 교체가 대부분 북방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북방에서 황제가 많이 배출되었다. 이에 비해 남방 지역에서는 사회 통치와 종법 통치, 사상 통치가 상대적으로 허술했고, 이에 따라 사상이나 관념이 자유롭고 활발해질 수 있었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비교적 관대하고 자유로운 정치 환경이 예술의 대가들과 작품을 생산했다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은 공자가 말한 이른바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 의 관념으로서 이 여덟 자에 내포된 함의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간주 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말은 인자하고 후덕한 사람들은 고산준령을 즐겨 찾고,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은 강이나 시내를 즐겨 찾는다는 뜻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인자(仁者)와 지자(智者)라는 지혜의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인자의 지혜는 산을 숭상하는 것처럼 중후하고 쉽게 변하지 않는 데 비해, 지자의 지혜는 강이나 시내처럼 쉽게 변하고 이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유추해보면 하천과 호수가 많은 지역에서는 지자들을 배출하는 지리 환경이 되고, 고산이나 평원, 황무지 등이 많은 지역은 인자들을 배출하는 지리 환경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의 성격과 지능에 대한 환경의 영향은 현대 과학으로도 반박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자들이 정치에 치중하는 데 비해 지자들은 문학과 예술에 경도하는 경향이 있고, 남방에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데 비해 북방에서 황제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은 사회의 필연성인 동시에 지리 환경의 필연성이라 할 수 있다.

인자와 지자는 지혜의 두 가지 유형일 뿐이며 둘 사이에 높고 낮음을 따질 수는 없다. 문인과 제왕도 서로 다른 사회적 역할일 뿐 실제 기능에는 고하의 구분이 없다. 그저 사람들은 제왕의 모습에서 부귀영화와 생사여탈의 권력을 보며, 문인과 학자들도 면류관 없는 왕이자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본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학자 서생이나 문인 아객들은 절대로 개국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자나 문인들이 배우는 성현의 도는 치국을 위한 것이지 결코 개국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현의 도는 수신과 양육의 이치를 가르치지 반역의 원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학자나 문인들이 대표하는 이상적 도덕은 항상 사회 현실에 집착하여 개탄하고 호소하고 애원할 뿐 절대로 반란을 제창하거나 백골 더미 위에 새로운 궁정을 세우지 못한다.

셋째, 학자나 문인들은 독서에 능하고 두 귀가, 항상 성현의 교훈을 향해 열려 있어 사회적인 수련이 부족하기에, 개국 황제들에게 필요한 야심과 임기응변의 능력, 무례함과 몰염치, 잔인함 등의 성격과 자질이 결핍되어 있다.

넷째, 중국은 전통적으로 학자와 제왕, 문인과 관리가 서로 엄격히 분리된 사회 유형을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문인이 황제나 관리가 되면 문인으로서의 품격을 상실하여 관리로서의 품격만 남게 되고 문인이 대표하는 이상적 도덕도 사라져 관직과 작위가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된다.

다섯째, 문인이나 학자들의 생활 수준은 예부터 그다지 낮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역과 권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고대 중국 사회에서는 진정한 인덕을 갖춘 이가 개국 황제가 되지 못하고 무뢰한이나 깡패가 황제가 되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깡패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 역사의 숙명 가운데 유일하게 서생 황제가 나타났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두 가지 기질이 하나의 인격에 체현되어 기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이 서생 황제의 성패를 고찰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망(王莽-BC 45~AD 23, 재위 AD 8~23)/ⓒ네이버참고
왕망(王莽-BC 45~AD 23, 재위 AD 8~23)/ⓒ네이버참고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18년 동안 왕망(王莽-BC 45~AD 23, 재위 AD 8~23)의 치세가 있었다. 대부분의 역사 들은 이 왕조에 관해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시기에는 한(漢) 왕조가 중단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하나의 왕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왕망이 황제를 정식으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수많은 법령과 정책들을 반포하고 시행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왕망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서생에서 임관이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황제가 된 서생 황제였다.

서기 16년, 황태후의 조카로서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진 왕망은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 폐후 허(許) 씨의 심복인 왕장(王長), 왕융(王融) 등과 함께 황후를 다시 세우려는 일련의 음모를 진행했고, 그 결과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극도로 명예를 추구하는 그의 권력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하층 선비들까지 깍듯이 예로써 대우하면서 많은 인재를 모았고, 조정에서 상급이라도 받게 되면 이를 전부 자신의 빈객과 막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 일상생활도 매우 검소하여 먹고 입는 것이 일반 백성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한번은 왕망의 모친이 병이 들어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제각기 부인들을 보내 문안을 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비단옷 차림이었다. 왕망의 아내가 황급히 문밖에 나가 부인들을 맞았는데, 입고 있는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었고 옷감이 모자라 치마가 간신히 무릎을 가릴 정도였다. 이를 보게 된 부인들은 왕망의 노복인 줄 알고 주인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바로 왕망의 아내인 것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왕망의 부인은 예를 다하여 손님들을 맞았지만 대접할 것이라고는 차 한잔뿐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청렴하고 소박한 인물로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왕망은 예의를 지키면서도 당시의 세력가였던 부(傅) 태후의 부당함에 반박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한 일로 강직한 신하로서의 미명을 얻기도 했다. 얼마 후에 애제(哀帝-전한의 제12대 왕, 태자 성제가 급사하자 20세에 즉위했다)가 방탕한 생활 끝에 사망하자 태후 왕씨는 왕망을 불러들여 상례의 거행을 돕도록 했다. 입조한 왕망은 우선 인심에 순응하다가 적절한 시기를 잡아 백성의 원성을 사고 있는 애제의 동성애 상대였던 동현(董賢)을 내쫓아 자살하게 했다.

이 일로 왕망은 태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아홉 살의 평제(平帝)를 도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정벌 전쟁을 벌일 줄도 몰랐고 치국안민의 이치는 더더욱 몰랐다. 결국, 민심을 얻기 위해선 미신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러 관원을 매수하여 흰 꿩과 코뿔소 등 길상의 동물들을 바치게 한 다음 이로써 자신의 인품이 하늘의 뜻과 부합함을 입증하려 했다. 왕망의 이러한 행위가 효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무사히 안한공(安漢公)에 봉해졌고, 자신의 딸을 평제의 황후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른바 ‘구석(九錫-천자가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아홉 가지 물품)’을 미끼로 정권을 찬탈하기에 이르렀다.

왕망의 이러한 행실을 종합해보면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신비주의이고, 둘째는 과거의 제도를 준수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자신의 운명을 믿는다는 것이다.

왕망은 줄곧 황제(黃帝)와 순(舜)임금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요(姚), 규(嬀), 진(陳), 전(田), 왕(王) 등의 성씨가 전부 동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 왕조의 선례에 따라 명당영대(明堂靈臺)를 설치하고 만 개나 되는 학사를 건립하여 유명한 유학자들을, 한데 불러 모은 다음 관학(官學)을 설치하고 교사와 학생들을 모았다. 황당한 것은 갖가지 이해할 수 없는 조령을 공포하고 웃음거리밖에 안 될 법령들을 제정했다는 점이다. 왕망은 『주례 周禮-유교 경전의 하나로 주대의 관제를 기록한 책, 주공 周公(BC 12세기)이 편찬했다』와 『악어 樂語』의 기록에 근거하여 빈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토지를 국유화하는 왕전제(王田制)와 전국의 물가를 일원화하는 5균6관(五均六管)을 시행했다. 그는 정전제 시기의 이상적 사회상을 그대로 현실에 옮기려 했으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평제를 죽이고 신(新) 왕조를 세운 처음 10년 동안 그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씨 왕족의 기의군의 끊임없는 반격을 당해야 했고, 천재(天災)가 닥친 데다가 녹림(綠林-후한 말, 왕망과 왕광(王匡), 왕봉(王鳳) 등이 백성들을 모아 조직한 도적떼)과 적미(赤眉-왕망의 신 왕조 말기에 일어난 농민 봉기군) 등 봉기군의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서기 23년 곤양 전역에서 패함으로써 마침내 정권을 잃고 말았다. 유수의 군사가 장안을 공격하는 위기의 순간에도 천명을 믿었던 그는 군신들을 이끌고 장안 남쪽 교외로 나가 울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때 그를 따라 함께 슬퍼하며 울어준 사람들에게 관직을 내리다 보니 그 자리에서 관직에 봉해진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곧 기의군의 칼에 목이 잘리고 말았다.

왕망은 중국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서생 황제로 오랜 숙고와 치밀한 계략 끝에 전한 정권을 탈취했다. 이처럼 일개 서생이 천하를 바꾸려 했던 사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의 정권 탈취가 정당했는가, 왕망의 신 왕조가 정통인가, 또는 왕망의 개인적 품성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탐구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그가 순수한 사기꾼이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야심가였는지, 또는 그의 정치 행태가 혹시 문인 학사 기질의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왕망의 정치 행태는 서생 기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고대의 정치제도를 전용한 것은 인심을 얻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주대의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지향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고대의 제례가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먹혀들어 갈 거라 판단하고 주나라 때의 제도를 모방하여 이상적인 도덕 사회를 세우고자 했다. 천명을 믿는 문제도 그가 이를 이용하여 등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천명을 강하게 믿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위기를 당할 때마다 저항할 준비나 대책을 구하지도 않으면서 신령에게 도움만 청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그는 허위의식과 간사하고 잔인한 성격을 지닌 음모가이면서 동시에 다분히 교조적이고 성실한 만큼 융통성 없는 전형적인 서생이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유가적 이상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유가의 문화와 이상을 합리적인 정치적 수단을 통해 발현시키지 못했고 경서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사서에 기록된 정책과 법령들을 교조적으로 빌리는 우를 범했다. 실제로 그가 제시한 왕전제나 5균6관 등의 정책은 하나같이 고서에서 빌려쓴것으로 ‘종이 위의 개혁’이 되고 말았고, 그 결과는 귀족들의 반대와 백성들의 원성이었다. 그의 비현실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서생 기질은 천하를 대란으로 몰아갔고 폭군이라는 오명을 가져다주었다. 농민 봉기에 대처하는 태도에서도 그는 부패한 유생으로서 유치한 서생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중국 역사에 있어서 서생의 위치는 항상 이러했다. 황제를 만들 수는 있어도 스스로 황제가 될 수는 없던 것이다. 완전한 품격과 지고한 도덕성으로 황제를 보필할 수는 있어도 직접 나서거나 호령할 수 없는 것이 서생의 본색이고, 일단 이러한 본색을 버리면 관료나 정객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왕망이라는 인물은 지식인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고 지식인으로서의 본분을 일탈한 그에 대한 세인의 평가는 폄하와 질타 일색일 수밖에 없었다.

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