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영화이야기 두편, 화려한 휴가 · 택시운전사

[뉴스프리존]박나리 기자= 다시 41년전 5.18 광주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이러한 아픔속에서 꾸준히 그날에 아픔을 기억하기위한 행사나 문화(영화) 소재로도 다양하게 전해젔다. 특히, 2007년에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택시운전사:2017년, 26년:2015년) 중 가장 오래됐지만, 5월만 되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 영화이다.

사진; 네이버 갈무리
사진; 네이버 갈무리

또, 기억으로는 2017년 8월 2일 개봉된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는 1980년 5월, 서울 택시운전사.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 유행어를 낳았고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은 외국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원을 준다는 말에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나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세계에 알린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그리고 그와 함께 한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다룬 작품이다.“광주를 취재한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운 택시운전사 김사복.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1980년 5월 광주를 스크린에 불러내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모티브는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제 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은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의 수상 소감이 담긴 다음의 신문 기사 한 줄이었다.

“내 눈으로 진실을 보고 전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용감한 한국인 택시운전사 김사복 씨와 헌신적으로 도와준 광주의 젊은이들이 없었다면 다큐멘터리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대한민국’으로 계엄 하의 삼엄한 언론 통제를 뚫고, 유일하게 광주를 취재해 전 세계에 5.18의 실상을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 그리고 80년 5월 광주의 한가운데로 힌츠페터를 태우고 들어갔다 온 평범한 소시민이자, 힌츠페터조차 끝내 다시 찾지 못해 익명의 존재로 남은 김사복 씨를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이들이 광주까지 가는 길, 광주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택시운전사의 마음 속 행로를 따라가는 <택시운전사>는 실재했던 두 사람의 관점이 가진 생생함으로, 1980년 5월 광주를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송강호, 토마스 크레취만, 유해진, 류준열의 첫 만남! 마음의 협연으로 빚어낸 시너지!”

세대도 국적도 개성도 다 다르다. 그러나 캐릭터가 가진 인간적인 드라마를 입체적으로 살려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배우’라는 점은 공통된다. 한국인이 가장 믿고 보는 배우 송강호와 독일과 할리우드를 넘나들며 전 세계 관객들을 만나온 명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어떤 캐릭터건 인물에 내재해 있는 깊은 인간미를 드리우는 유해진. 그리고 꿈과 아픔이 공존하는 청춘의 아이콘이 된 류준열. 이들 네 배우는 <택시운전사>를 통해 처음으로 한 스크린에서 만난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분명, 각자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네 배우는 <택시운전사>가 지닌 소재의 무게에 짓눌려 놓칠 수도 있었을, 캐릭터의 인간적인 본질과 고민, 희로애락을 섬세하면서도 실감나게 그려내며 서로 교감했다. 또한 5.18이라는 사건 뒤에서 제대로 복기된 적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대변하며 <택시운전사>를 완성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서울 택시운전사와 독일기자의 동행, 서울을 출발할 때 운전석과 뒷좌석이었던 두 사람의 위치가 광주를 관통하며 운전석과 조수석으로 바뀌기까지.

자연스러운 마음의 교류를 보여준 송강호와 토마스 크레취만. 그리고 그들에게 소박한 진수성찬을 대접하는 광주 택시운전사 황태술 역의 유해진, 만섭의 택시를 함께 타고 다니며 통역을 돕는 광주 대학생 구재식 역의 류준열까지. 언어를 비롯한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네 배우들의 첫 만남은 마음의 협연을 이뤄내며 또 한번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연출을 맡은 장훈 감독은 영화 <택시운전사>의 시작이 1980년 5월의 광주를 취재했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그리고 서울에서 그를 태우고 광주까지 간 한국인 택시기사 김사복의 이야기였다고 밝혔다. 한국 현대사의 큰 아픔으로 남은 사건을 다룬다는 부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과연 내가 이런 큰 이야기를 누를 끼치지 않고 영화적으로 잘 그려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택시운전사> 안으로 끌려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동력은 만섭과 피터, 두 주인공이었다.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는 일본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국의 상황을 듣고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광주에 취재를 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한국의 광주까지 오게 했을까? 그리고 우연히 그 길에 동행한 평범한 택시운전사는 그 곳을 함께 다니며 무엇을 보고 겪었을까?

너무도 평범한 서울의 택시기사 만섭의 눈에 비친 시대의 모습과 작은 한 소시민의 마음속의 격랑을 따라가면서, 역사는 위인들로 인해 이뤄지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선택과 용기가 모여서 이뤄져 가는, 멀리서 조망한 벽화가 아닌, 가까이서 들여다 본 세밀화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만섭의 택시에 함께 타고 가면서,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은 계기라도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 중에 5.18 광주의 소재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극중 인물들은 실제 인물을 모티브로 제작한 배우 이준기씨가 연기한 강진우는 광주대동고 3학년생이었던 전영진 열사이다.

영화에는 그날에 아픔을 그대로 담아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책상과 걸상으로 몽둥이를 만들고, 교실을 돌아다니며 ‘민주학생 동참하라.’며 소리를 치기도 한다. 학생들은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라며 호소하기도 한 장면이다.

뜻을 함께한 학생들은 ‘전두환을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교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교실밖 하늘에는 군용헬기가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고, 교문 앞과 학교 주변 버스 정류장에는 공수부대원과 계엄군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진우와 학생들이 또다시 시위를 하러 나가는 장면에서 교사는 치약을 바르고 가면 맵지 않다며 강진우의 눈 밑에 직접 치약을 발라 준다.

이때의 광주 시내는 초중고는 19일 단축수업에 이어 20일부터 휴교에 들어가 20일 문제집을 사러 잠시 외출한 전영진 열사는 길에서 마주친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맞고 집에 와 시위에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로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21일 아침밥을 먹자마자 또다시 금남로에 가겠다고 했지만 온 가족이 말렸다. 어머니는 “시몬아 (전영진 열사의 세례명) 제발 나가지 마라, 네가 지금 나가면 파리 목숨이다. 지금 네가 살아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라”고 당부했다.

전 열사는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틈을 타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하고 빠져나와 전남도청 앞으로 나간다. 오후 1시쯤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애국자가 울려 퍼지자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시민들과 함께 도망치던 전영진 열사는 광주 노동청 앞에서 머리에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다.

영화에서는 강진우가 부상자를 돕다가 형 강민우 앞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맞고 쓰러진다. 강민우마저 죽을 위기에 빠지자 박흥수 (안성기 역)가 트럭으로 구해준다.

강민우는 동생을 업고 병원으로 가지만 이미 강진우는 사망한 후였다. 형은 동생에게 ‘집에 가자’며 크게 울부짖는다.

전영진 열사가 광주 노동청 앞에서 쓰러졌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영화처럼 부상자를 돕다가 총탄에 맞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전 열사의 부모는 아들이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찾아 나섰지만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아들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전남대병원과 적십자 병원에 갔지만, 전 열사는 그곳에 없었다.

아버지 전계량씨는 22일에서야 아들이 기독교병원 영안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혼자서 전 열사의 시체를 입관시킨다. 당시 어머니 김순희씨는 떨리는 마음 때문에 아들의 안장조차 보지 못했다고 한다.

광주대동고 교정에는 전영진 열사의 추모비가 있다. 매년 5월이면 총동창회에서는 추모식을 진행한다.

광주대동고 교정에 세워진 전영진 열사 추모비, 대동고 학생들이 전 열사를 추모하고 있는 모습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전영진 열사 ⓒ광주대동고 총동창회 페이스북
광주대동고 교정에 세워진 전영진 열사 추모비, 대동고 학생들이 전 열사를 추모하고 있는 모습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전영진 열사 ⓒ광주대동고 총동창회 페이스북

지난 16일에도 부친인 전계량씨와 학창 시절 동기, 총동창회 임원들과 대동고 이철수 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다.

5월 21일이면 광주대동고 학생들은 전영진 열사를 추모하는 묵념을 합니다. 1980년 광주대동고 3학년이었던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할 때마다 안장된 친구의 묘역을 찾았다.

518 당시 전두환 정권은 광주 시민들을 가리켜 난동을 부리는 불순분자라고 불렀다. 고정간첩의 지시와 유언비어에 속아 넘어가 폭력을 휘두른 시위대라고도 했다. 그래서 치안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총을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중학교 3학년 때 518 광주를 현장에서 목격했던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아래는 광주석산고 학생이 1981년 2월에 쓴 글이다.

1981년 광주석산고 1학년 학생들이 518 사건에 대해 쓴 작문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1981년 광주석산고 1학년 학생들이 518 사건에 대해 쓴 작문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이 사건을 굳이 사태라기보다는 의거라고 칭하고 싶다. 정부에서는 일부 불순분자의 책동이라고 했으나 이는 믿을 수 없는 무책임한 말이다.

외신기자 등에 의해 찍힌 필름은 외국에서 방영이 되는데 왜 당사자인 우리들만이 보지 못하는지 의문스럽다. 외국에서는 이 사실을 모두 기사화하는데 우리 정부는 왜 억압하려 하는가?”

비록 고등학생이 썼지만, 기자보다 더 날카롭게 80년 5월 광주의 현실과 정부의 불합리한 언론 통제를 지적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면 학생들은 어른보다 더 용감했다. 불의에 맞서 거리에 나섰고, 독재의 서슬 퍼런 총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를 학생들 같지만, 지금도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학생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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