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부터 가나아트센터...회화성 뛰어난 ’위원화초석일월연‘ 등 100여점 출품
“우리의 미감을 그대로 담고 있어... 청자, 백자 못지 않아 우리 미술사 다시 써야”

 

이근배 시인

[서울=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벼루는 단순한 골동품이 아니라 선비정신이 깃든 문화의 한 단면입니다. 문방 문화는 한·중·일 세 나라가 공유하고 있지만 벼루의 대종(大宗)을 자부하는 중국의 당·송·명·청 어느 시대의 벼루도 그 규모나 회화성, 살아 움직이는 극사실의 조탁이 조선 개국 무렵 만들어진 벼루(위원화초석일월연)에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의 벼루는 청자, 백자 못지않은 우리의 자랑거리입니다.”

연벽묵치(硯癖墨痴)’의 열혈 벼루 수집가로 유명한 이근배 시인이 반평생 수집한 벼루를 보여주는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전이 16일부터 27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가나문화재단이 시인의 등단60주년을 기념해 마련하는 자리다.

위원화초석 장생문일월연
위원화초석 장생문일월연
위원화초석 월하매죽문연
위원화초석 월하매죽문연
위원화초석 연화문일월연
위원화초석 연화문일월연

이번 전시에는 시인의 1000여점 소장품중에서 엄선한 100여점의 명품 벼루들이 출품된다. 주요 출품작으로는 1973년 창덕궁 ‘명연전(名硯展)’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뽑혔던 이력을 지닌 김종학 화백이 소장했던 ‘정조대왕사은연(正祖大王謝恩硯)’을 비롯해 가로 26cm, 세로 41cm의 큰 화면에 매죽문을 빽빽하게 채운 ‘위원화초석 매죽문일월대연’, 가로 21, 세로 40cm의 검고 큰 석판에 펼쳐진 화려한 조각솜씨가 일품인 ‘남포석 장생문대연’ 등이 있다.

출품작들은 크게 위원석과 남포석으로 나눠진다. 위원석 벼루는 조선 전기에 평안북도(오늘의 북한 행정구역으로 자강도) 위원군의 위원강 강돌에서, 남포석 벼루는 19세기 이래 충청남도 남포군 남포면(오늘의 보령시 남포면) 성주산에서 주로 채취한 벼룻돌로 만들었다.

위원화초석 매죽문일월대연
위원화초석 매죽문일월대연
위원화초석 기국농경장생문연
위원화초석 기국농경장생문연
위원화초석 '은대원'명일월연
위원화초석 '은대원' 명일월연

이근배 시인에게 벼류는 각별한 것이다. 지난 2014년 9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새 시집 '추사를 훔치다'(문학수첩 펴냄)를 펴냈을 당시 그는 오랜기간 시집을 내지 않은 이유를, 추사 김정희가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에 빗대어 설명한 적이 있다. 추사는 편지에서 "열 개의 벼루를 갈아 바닥을 내고 천 개의 붓을 닳도록 썼지만, 편지 글씨 하나도 못 익혔다"고 적었다. 시인은 "저 추사는 천 개의 붓을 다 쓰고도 글씨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떻게 붓을 잡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그를 다시 곧추 세운 것도 추사였다. 책 속 ‘벼루읽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추사의 벼루를 보았다/ 댓잎인가 고사리 잎인가/ 화석무늬가 들어있는/ 어른 손바닥만 한 남포 오석..../ 한 눈에 들어올 것이 없는/ 그 돌덩이가 내 눈을 얼리고/ 내 숨을 멎게 한다/ 어느 새 나는 쇠망치로도 깨지 못할/ 유리 장을 부수고 벼루를 슬쩍?/ 그랬으면 오죽 좋으련만/ 못나게도 내 안의 도둑은 오금이 저린다/ 박물관을 나서는데/ ―게 섰거라!/ 그 작고 검은 돌덩이가 와락/ 내 뒤통수를 후려친다.

벼루가 시인의 예술적 매개체가 된 순간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에게 벼루는 연전(硯田)이라 불리며 농부의 논에 비유될 정도였다.

“신의 솜씨로 깎은 고려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벼루들이 조선조 글과 글씨, 그림을 거둔 논밭이 돼 주었습니다”

벼루에 먹을 갈며 학문과 예술의 밭을 경작했다는 얘기다. 선비들은 자연스레 일생일연(一生一硯)으로 좋은 벼루 하나 갖는 것을 원했다. 선비들의 기호에 맞게 장인들도 기능성만큼이나 조형미를 끌어올리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의 미감을 그대로 담고 있는 기물입니다. 청자나 백자 못지 않게 우리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입니다.”

전시를 주관한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도 같은 생각이다. 김 이사장은 “발견도 어렵지만 재발견도 못지않다. 대뜸 말하지만 한국미학은 재발견·재평가 역정(歷程)의 곡절을 거쳤던 장르가 적지 않았다. 청자의 아름다움은 안타깝게도 강점 일본식민주의자의 눈을 거쳐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 이 역정의 시발이었다면 시발이었다. 이번 위원석(渭原石)과 남포석(藍浦石) 벼루 전시회 또한 한국미학 재발견의 추가장르로 기록될만하다”고 강조했다.

어린시절 부터 조부의 사랑방에서 남포석 벼루와 조선백자 연적을 보고 자란 시인에게 벼루는 친숙한 기물이다. 중국 단계석 벼루를 수집하기 위해 중국을 뻔질나게 드나들기도 했다.이런 여정은 절로 우리 벼루에 대한 안목을 트이게 했다.

남포석 장생문연
남포석 장생문연

“우리나라의 벼루들은 압록강 기슭의 위원渭原에서 나오는 화초석花草石이 으뜸인데요, 녹두색과 팥색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층을 이뤄서 마치 풀과 꽃이 어우러지는 것 같대서 이름도 화초석인데요, 거기 먹을 가는 돌에다 우리네 사는 모습이며 우주만물을 모두 새겨놓았는데요, 그 조각들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 귀신의 짓거리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데요, 내가 가진 그것들 중의 하나에는 열한 명의 아이들이 냇가에서 벌거숭이로 모여서 놀고 있었는데요, 삼백 년쯤 전에도 이중섭李仲燮이 살았던 것인지? 고추 뻗치고 오줌 싸는 놈, 발버둥치고 앉아서 우는 놈, 개헤엄치고 물장구치는 놈, 씨름 한판 붙자고 덤벼드는 놈, 고 녀석들 얼굴 표정이며 손발의 놀림이 살아서 팔딱거리는데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린 날 동네 아이들과 냇가에서 멱감던 내가 그 속에 있는 것인데요, 물가에는 가지 말거라. 외동아들 행여 명이 짧을까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는데요, 어머니 세상 뜨신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말씀 안 듣고 세상의 깊은 물속에서 개헤엄으로 허우적거리고만 있는 것인데요” (이근배 ‘하동河童―벼루 읽기’)

자유분망하고 생동감 넘치는 우리 벼루는 정형적인 틀에 갇힌 중국벼루와는 격을 달라한다는 얘기다. 벼루에 관해 쓴 연작시만 80여 편에 이르는 시인은 임진왜란때 도공 뿐 아니라 벼루장인들도 일본으로 끌려갔음을 환기시킨다. 이후 정통맥이 끊기게 됐다는 것이다.

남포석 장생문대연
남포석 장생문대연
남포석 월송문연
남포석 월송문연

특출했던 조형성을 이 시대에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 시인의 벼루사랑이 한국미학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김형국 이사장은 “해와 달, 새와 나무, 뱃놀이, 밭갈이 등의 농경사회 풍경이 마치 세필화로 그린 듯 전개되는 위원석의 조형은 감탄불금이다. 이제 우리 전통미학의 재발견 역사에서 벼룻돌도 더하게 되었다. 일본사람의 앞선 사랑으로 미시마(三島)라 부르던 것을 고쳐 잡아 분장회청사기 곧 분청(粉靑)이라 이름을 바로 세운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지의 전시에서 찬사를 받았고, 작가 이름이 없다고 대수롭잖게 여겼던 민화는 수묵화 일변도 조선회화사에서 그 대척(對蹠)인 채색화로 모시고도 남는다는 것이 사계의 공론으로 익어가고 있다. 이에 견줄만한 일을 시인이 해냈다”고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근배 시인은 “우리벼루가 시작(詩作)에 영감의 원천이 돼 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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