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論(69) 분쟁을 피하고 평화를 얻는 언변

전쟁으로 얻은 정권은 전쟁으로 망한다는 말도 그에게는 예외였다.

무수한 사람들이 남의 병권(兵權)을 탈취하여 자신의 권력을 집중시키고 공고히 했지만, 한 잔 술로 병권을 빼앗은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927~976 재위 960~976)의 사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하여 더욱 유명하다.

조광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시대 조건과 그의 개인적 경력 덕분이다. 조광윤은 가난하고 천한 집안 출신으로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그다지 특출난 면이 없었다. 그러다가 곽위(郭威)의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상당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후한의 명장 곽위는 스스로 칭제하여 후한 왕조를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광윤은 대단히 용감하고 뛰어난 전략가로의 능력을 보였고, 이를 인정받아 금군의 중급장령으로 발탁되어 곽위를 옹립하는 과정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곽위는 장령들의 옹립으로 후주(後周)의 태조가 되었고 조광윤도 동서반행수(東西班行首)로 발탁되어 금군의 고급 군관이 됨으로써 입신의 기반을 마련했다.

후주 정권이 성립되고 얼마 후 곽위가 병사하자 양자인 시영이 황위를 계승하여 후주의 세종이 되었다. 세종은 조광윤을 금군의 최고 우두머리인 전전도점검(殿前都点檢)으로 발탁했다. 세종마저 병사하고 일곱 살인 아들 시종훈(柴宗訓)이 황위를 잇게 되면서 황후의 섭정이 시작되자, 통치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이때가 바로 조광윤이 대권을 장악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조광윤은 후주의 세종이 병사하기 전에 치밀하게 금군의 대오를 정비했고, 세종의 위임하에 최고의 정병들을 골라 군사를 조직하고 최고의 정예군을 장악했다. 세종이 죽자 후주의 왕조에서는 그와 대권을 다툴 인물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윤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교병변(陳橋兵變)을 통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꼽힌다. 이 같은 기적은 또 한 번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말 한마디로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공고히 한 일이다.

조광윤이 북송의 옥좌에 앉아 인심을 규합하고 전 왕조의 중신들을 대거 수용하여 안정된 정국을 실현하였으나, 몇 가지 난제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국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전국 통일의 책략을 마련하느라 밤새 끙끙거리며 고심하던 조광윤은 동생 조광의(趙光義)와 함께 조보(趙普)를 찾아가 의견을 구했다. 조보는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 나와 조광윤 형제가 눈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물었다.

“밤이 깊었고 큰 눈까지 내렸는데 황상께서 어떤 일로 이 시각에 절 찾아오셨습니까?”

“지금 사방이 전부 남의 땅인데 어떻게 편히 두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겠소? 그대와 이 문제를 상의하러 온 것이오.”

“지금 폐하의 천하는 아직 작지만 남정 북벌을 통해 전국을 통일할 기회가 무르익었습니다. 폐하께선 어떤 계책을 갖고 계신지요?”

조광윤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먼저 태원을 수복하는 것이 어떻겠소?”
조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태원은 남북의 중간에 있기에 그곳을 먼저 점령할 경우 요(遼)의 남하로 우환이 야기될 것입니다. 잠시 태원을 보류하여 북방의 병풍으로 삼으시고 남방의 여러, 나라들을 먼저 평정하시면 태원은 저절로 폐하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조광윤은 조보의 건의에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받았다.

“내게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소. 그래서 그대의 의견을 듣고자 했던 것이오!”

그리하여 먼저 남쪽을 정벌하고 나서 북쪽을 정벌한다는 책략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조광윤은 즉시 출병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금군의 지휘권과 병권의 과도한 집중이라는 두 가지 문제였다. 정변으로 황위에 오른 조광윤은 금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금군을 이용한 병변을 두 차례나 몸소 체험한 상태였다.

서기 961년, 조광윤은 양주 이중진(李重進)의 반란을 진압한 후 전전도점검이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모용연소(慕容延釗)라는 금군의 최고위 직책을 없애버린 바 있었다. 하지만 금군의 고위급 장령인 석수신(石守信)이나 왕심기(王審琦), 고회덕(高懷德) 등이 자신을 옹립하긴 했지만, 아직 자신의 심복이 된 것이 아니었고, 이들 모두 군문에 투신한 지 오래라 군정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밖으로 출정을 나가는 일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조광윤이 조보에게 말했다.

“당(唐)말 이후 천하가 바뀐 지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제왕의 성씨는 이미 여덟 번이나 바뀌었고, 전투는 여전히 그치질 않고 있소. 그러다 보니 백성들의 고통이 말이 아닌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소. 짐은 하루속히 천하의 전쟁을 종식 시키고 국가의 장기적인 안정과 발전을 도모하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오.”

조보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이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것은 천하 백성들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는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요. 변방 지역의 세력이 너무 커서 군주의 위세가 약하고 신하들의 권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되돌리기도 어렵고 정국을 통제하기도 어려워진 것이지요. 지금도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점차 변방 지역의 세력을 약화하고 그들의 재물과 양식의 수입을 통제하여 변방 지역의 정병을 폐하의 수하에 귀속시키는 것뿐 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천하는 자연스럽게 안정될 것입니다.” 

조광윤은 조보가 말한 치국과 변방 안정의 책략에 깊이 공감하고는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더, 이상 말 안 해도 될 것 같소. 내 이미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소!”

그리하여 그는 즉시 ‘한 잔 술로 병권을 빼앗을 방책’을 준비했다.

병권을 회수하는 것은 매우 민감하고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병변을 유발하거나 큰 혼란을 초래하기에 십상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이런 전례는 무수히 많았다. 조광윤은 날을 잡아 석수신과 왕심기, 고회덕 등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는 신하들과 더불어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 어느 정도 자리가 무르익자 시중들던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중을 털어놓았다.

“그대들의 도움이 없이는 황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소. 난 그대들이 내게 베풀어준 은덕에 영원히 감사할 것이오. 하지만 천자가 된다는 것도 그리 편하기만 한 일이 아니오. 차라리 절도사로 지내는 것이 더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오.”

석수신 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 이유를 물었다. 조광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이유는 간단하오. 장군들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천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소?”

이는 대단히 민감한 발언이었다. 만일 모반의 의도를 내비치기만 해도 구족을 멸하는 화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석수신 등은 몹시 황공하고 불안한 마음에 연달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무슨 까닭에 그런 생각을 다 하십니까? 이제 천명이 정해졌는데 누가 감히 부정한 야심을 품고 천자의 자리를 넘보겠습니까?”

“그대들 말이 맞소. 물론 그대들에겐 부정한 야심이 없겠지만 수하에 있는 장령들이 부귀영화를 탐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고 그대들도 일단 황포를 입었으니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들의 옹립에 힘입어 황제가 됐다는 것을 벌써 잊지는 않았을 것 아니오?”

석수신 등은 그제야 조광윤이 자신들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들은 모두 눈치가 빠르고 총명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당시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았고 조광윤과 천하를 놓고 다투다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현명한 길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해 앞길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황급히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로 충성을 다짐했다.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폐하께 그런 심려가 있으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희를 어여삐 여기셔서 살길을 마련해 주십시오.”

조광윤은 자신의 언변이 석수신 등 고위 장령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판단하고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격려했다.

“인생은 마치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허무하고 무상한 것이오. 근심 없이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다가 자손들에게 부귀영화를 물려주는 것처럼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소? 그대들도 병권을 풀고 외방으로 나가 지방관이 되어 편히 살면 좋지 않겠소? 넉넉한 재산으로 마음껏 주연과 미색을 즐기면서 말이오. 난 그대들과 혼인을 약속하고 한 가족이 되고자 하오. 그러면 군주의 신하가 한 몸이 되어 불필요한 근심 없이 즐겁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겠소!”

조강윤의 말에 석수신 등은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들은 즉시 엎드려 황은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

“폐하께서 저희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정말 죽어도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석수신, 고회덕, 왕심기, 장영탁(張令鐸), 조언휘(趙彥輝) 등은 조광윤의 의지가 분명하여 절대로 피할 도리가 없는 데다가 금군 내에서의 그의 지위가 확고부동함을 깨닫고, 다음날 병을 핑계로 병권을 내놓겠다는 청원을 보내왔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회자 되는 한 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들로 금군 장령들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조건은 세 가지이다. 자질이 일천 해야 하고, 위세와 명망이 높지 않아야 하며, 세력이 강력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독립적 권한을 주어 서로 견제하게 한다는 새로운 통치방식이 가미되면서 변방 지역의 병권은 조광윤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리하여 송 왕조는 변방 지역할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장기적인 안정과 발전을 위한 든든한 기초를 마련했다. 이는 중국의 전통사회가 새로운 역사단계로 발전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성숙해졌다는 징표였다. 이로써 황제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긴 했지만 이와 동시에 장군과 병력이 서로 조화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형국을 조성하여, 모든 군사작전의 책략을 황제가 친히 제정해야 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그 결과 병권이 지나치게 상부에 집중되다 보니 병력이 약화 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나중에 송군이 요와 서하에 대항하여 접전할 때 싸울 때마다 지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이는 조광윤과 조보가 천하 안전의 책략을 상의할 때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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