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대한 연극, 삶과 치유의 이야기

"서교동에서 죽다" 커튼콜 /(사진=Aejin Kwoun)
"서교동에서 죽다" 커튼콜_병호/만화가게주인(김두은), 모친(린다전), 도연(강해진), 진영(박완규), 진수(강민재), 진석(박정민), 진희/숙모(서진), 철용/마귀할멈(박정현) /(사진=Aejin Kwoun)

[서울=뉴스프리존] 권애진 기자= 자전적인 나의 이야기가 연극이 될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 속 피해의식과 죄의식을 꺼내는 것, 그리고 글로 써 내려가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글을 무대 위에 끄집어내어 관객 앞에 드러내기까지 쉽지 않은 고민이 어떻게 ‘연극’이라는 장르로 관객들과 만나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기억’을 따라가는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 또한 자신의 ‘기억’을 만나게 해 주는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가 소소하지만 연극적인 감동을 주며 막을 내렸다.

한 아재의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라며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인사하는 진영 역 박완규 배우는 아버지로 인한 피해의식과 동생 진수로 인한 죄의식에 둘러싸여 자신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주인공 진영을 연기하며 평범한 듯하면서도 격렬한 내면의 고통을 특유의 깊은 음색과 강렬한 눈빛으로 소화해 냈다. /(사진=Aejin Kwoun)
한 아재의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라며 객석과 무대를 오가며 인사하는 진영 역 박완규 배우는 아버지로 인한 피해의식과 동생 진수로 인한 죄의식에 둘러싸여 자신을 제대로 된 인간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주인공 진영을 연기하며 평범한 듯하면서도 격렬한 내면의 고통을 특유의 깊은 음색과 강렬한 눈빛으로 소화해 냈다. (사진=Aejin Kwoun)

지난 6월 20일부터 7월 4일까지 대학로 씨어터쿰 소극장에서 “서교동에서 죽다”로 돌아온 고영범 작가는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이 바탕이 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환해 자신의 현재를 규명하는 독특한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잊고 싶은 기억, 잊어버린 기억을 무대 위로 소환해 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최근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에어콘 없는 방’, ‘오레스테스’ 등을 고영범 작가와 함께 만들어온 이성열 연출은 ‘오슬로’, ‘화전가’ 등에서 익히 보여준 굵직하면서도 섬세한 무대 구성과 연출로 주인공 진영의 어둡고 가려진 기억의 방을 거닐며 개인의 기억을 넘어 한 시대를 되짚어보게 만들어 주었다.

진영(박완규)는 조카 도연(강해진)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속에 묻어 둔 아픈 과거와 만난다. (제공=극단 백수광부)
진영(박완규)는 조카 도연(강해진)과의 대화를 통해 마음속에 묻어 둔 아픈 과거와 만난다. (사진=극단 백수광부)

자신의 기억의 한 부분을 소환하며 소위 50대 후반 한 사내의 배후를 들여다보고 있는 작품 “서교동에서 죽다”의 희곡을 집필한 고영범 작가는 “한국의 386세대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실패하고 있고, 이건 이 이야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영은 다음 세대인 이십 대 후반인 조카이자 여성인 도연이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노력에 실려서 움직인다. 지금 시대의 가장 약한 고리인 20대 미혼여성 도연을 통해서야 전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은 가능해지고, 이게 이 이야기의 희망이라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어릴 적 진영은 아버지의 사업실패 후 부촌인 서교동에서 가난한 화곡동 시장통으로 이사하게 된다. 큰형 진석(박정민), 누나 진희(서진), 어머니(린다전)에 대한 이야기는 오롯이 진영의 기억이다. /(제공=극단 백수광부)
어릴 적 진영은 아버지의 사업실패 후 부촌인 서교동에서 가난한 화곡동 시장통으로 이사하게 된다. 큰형 진석(박정민), 누나 진희(서진), 어머니(린다전)에 대한 이야기는 오롯이 진영의 기억이다. (사진=극단 백수광부)

죽음이 아닌 삶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라고 전하는 이성열 연출은 주인공 진영이 이미 예전에 ‘죽은 자’였기에 현재까지도 ‘죽은 채로’ 살고 있던 그가 조카 도연을 만나 ‘과거의 사실-기억’과 마주친다고 말한다. 제대로 살기 위해 ‘똑바로 보려는’ 도연을 만난 진영이 서서히 자신의 어둡고 아픈 기억과 마주 보며 점차 ‘산 자’로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 속에서 관객들 또한 자신들의 과거와 마주하며 무대 위의 감동과 별개로 자신의 서사를 그리게 만들고 있다.

진영의 기억 속 천사같았던 동생 진수(강민재)는 그의 죄의식이자 피해의식이다. /(제공=극단 백수광부)
진영의 기억 속 천사같았던 동생 진수(강민재)는 그의 죄의식이자 피해의식이다. (사진=극단 백수광부)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관객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대 위 인물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작가와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탁월한 호흡은 작품을 보고 남겨진 무게감을 오히려 쉽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게 만들어 준다. 리드미컬하고 군더더기 없는 희곡과 무대를 몇 마디 말로 표현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감동까지 오롯이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듯싶다.

자수성가한 듯한 큰형과 암을 앓고 있는 누나의 기억과 외국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는 진영의 기억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모른다.  1970년대의 서교동과 화곡동의 기억 또한 그들의 기억과 관객들의 기억이 얼마나 맞닿아 있을지 알 수 없다. /(제공=극단 백수광부)
자수성가한 듯한 큰형과 암을 앓고 있는 누나의 기억과 외국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는 진영의 기억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모른다. 1970년대의 서교동과 화곡동의 기억 또한 그들의 기억과 관객들의 기억이 얼마나 맞닿아 있을지 알 수 없다. (사진=극단 백수광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과거와 만나고, 현재를 성찰하며, 새로운 미래로 출발할 에너지를 안겨준 연극 “서교동에서 죽다”는 극단 백수광부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주며, 연극은 현장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아로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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