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윈의 <종의 기원>, 호프스태터의 <괴델, 에셔, 바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주역>, <논어>, <맹자>, <장자>, <아함경>,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마르크스의 <자본론>, 푸코의 <감시와 처벌>….

서울대 추천도서 100선 중 일부다. 또 다른 대학의 추천도서에는 뉴턴의 <프린키피아>,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헤겔의 <정신현상학>,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같은 책들도 보인다.

 

내가 무지한 탓인가. 여기에 적힌 책 가운데 제대로 읽은 것은 거의 없다. 물론 읽기를 시도한 책은 많다. 하지만 <종의 기원>은 지루해서, <괴델, 에셔, 바흐>는 어려워서 포기했다. <아함경>은 일부만 읽었을 뿐, 그 방대한 양에 질려 전체를 읽을 엄두도 못 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은 하이데거, 헤겔의 저작들과 더불어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애물단지다. <프린키피아>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 책을 샀을까 생각하는 책 중 하나다.

도대체 책을 추천한 이들은 <아함경> 하나 읽는 데만 몇 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철학 전공자도 힘겨워하는 칸트나 헤겔,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을 대학 4년 다니는 동안 수필집 읽듯이 읽으라는 것일까.

2. 공동체 개설 이후 꾸준히 늘어나던 강좌와 세미나 참여자 수가 최근 주춤해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먹고살기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공부에 대한 관심이 옅어졌을 수도 있다.

이른바 인문학 열풍을 타고 정부와 지자체가 인문학을 지원하고 각급 도서관, 문화원, 복지관 등이 다투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무료로 하는 강좌와 강의·세미나를 이끄는 학자의 사례비와 공간 임대료 등을 참여자가 부담해야 하는 인문학
공동체의 강좌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비슷한 인문학 공동체도 많이 생겨났다. 서울 마포 일원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는 단체만 꼽아도 한 손이 모자랄 정도다. 당초 크지 않았던 파이가 더 잘게 쪼개진 것이다.

사람이 줄었거나 말거나 신록의 계절을 맞이하며 새로운 강의와 세미나를 위해 사람들과 머리를 맞댄다. 초점은 대학에서 해야 하나 외면한 강좌나 세미나, 정부나 지자체, 도서관에서는 인기가 없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대학에서 발표만 한 뒤 나 몰라라 팽개친 고전 강독도 포함돼 있다. 고전이 '누구나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받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혼자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의 지적 정화가 구절마다 배어 있고, 그것이 시대를 지날 때마다 새롭게 해석된다. 고전은 광대하고 심원한 사유의 바다를 건너는 가장 좋은 도구다.

3. 휴일 나들이를 할 때 자주 사패산 터널을 지난다. 입만 열면 생태, 환경 운운하며 터널 공사 반대하는 이들을 응원하다 터널이 생기자마자 누구보다도 터널을 자주 이용하는 아이러니라니.

돌아보면 터널이 생긴 뒤 몇 년이 지나도록 옛길을 돌아다닌 기억이 없다. 터널 공사 이후 고갯길을 아예 버리다시피한 건 이곳뿐 아니다. 미시령, 조침령, 죽령, 이화령, 박달재….

긴 연휴 나들이길,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운전하다 어느 터널의 진입로를 지나쳤다. 정신을 차린 뒤 유턴을 하려다 그냥 고개를 넘었다. 천천히 차를 몰다보니 한때 자주 걸었던 산길, 내친김에 차를 세우고 그 길을 걸었다.

터널이 생긴 뒤 10여년이 되도록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이다.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키 큰 팥배나무 꽃 아래엔 철쭉, 애기똥풀, 각시붓꽃, 제비꽃,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개별꽃, 둥굴레 같은 봄꽃들만 한창이었다. 내가 목적지만 생각하며 어두운 터널을 달리는 사이, 이들은 숲속에서 꽃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에 사람이 줄어든 김에 다시 초심을 떠올리며 돌아가기를 생각한다. <순수이성비판> 2년, <정신현상학> 1년, <주역>과 <장자> 원전 각 1년, <맹자집주> 8개월….

공동체에서 책을 읽으며 소요된 날들이다. 대학의 추천도서가 대학 4년 동안 읽으라는 책이라기보다 평생 읽어가야 할 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인문학은 속도보다 느림을, 목표를 향한 돌진보다 돌아감에 익숙한 공부다. 편익보다 의미를 생각하는 공부다. 천천히 공부하며 돌아가다 보면, 봄꽃들이 잔치를 벌이는 숲길과 조우하는 행운이 있기도 할 것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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