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살기가 꽤 어렵습니다. 어쩌면 부모형제, 친구, 도반 동지 간에도 마음과 마음을 연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러나 창자를 맞대고 서로 부등 켜 않고 속 시원하게 울 수 있는 사이는 우리 덕화만발 가족이 아닐까요?

딸 셋을 둔 가정에 한 아이가 입양됐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애를 친 동생으로 생각하고 사랑해 주도록 해라.” 그런데 입양되어 온 아이가 낯선 곳에 와서 그런지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기만 하는 겁니다.

언니들은 이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인형도 사다주고, 먹을 것과 옷이며 수많은 선물을 건네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랑스럽게 아이를 달래주던 언니들도 사흘이 넘게 울어대기만 하던 아이에게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제일 큰 언니가 너무 답답한 나머지 “너 도대체 왜 우는 거니?” 하면서 같이 울어 버렸습니다.

언니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이에게 섭섭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려 버렸고, 둘은 한참을 같이 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잠에서 일어난 아이는 그 다음부터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함께 울던 언니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면서 마음을 열게 된 것입니다.

아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값비싼 선물이 아닌 자신과 함께 울어주고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친구이었습니다. 사랑은 좋은 것만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 슬픔, 외로움까지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덕분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속엔 사랑과 은혜 그리고 감사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부모님 덕분에, 친구 덕분에,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들 덕분에, 도반 동지님들 덕분에 항상 감사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원불교 교리(敎理) 중에 <일상수행의 요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 1조,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제 2조,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 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를 세우자.

제 3조,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 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를 세우자.

제 4조, 신(信)과 분(忿)과 의(疑)와 성(誠)으로써 불신(不信)과 탐욕(貪慾)과 나 (懶)와 우(愚)를 제거하자.

제 5조,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

제 6조, 타력생활을 자력생활로 돌리자.

제 7조,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제 8조,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제 9조, 공익 심 없는 사람을 공익 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이 9조 중, 1~3조에 <심지(心地)>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지란 성품(性品)의 다른 말. 마음의 본바탕, 마음자리 등을 뜻합니다. 또 ‘마음의 바탕’,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 ‘선악이 없는 근본자리’, ‘한 생각 나오기 이전의 성품자리’ 등으로도 말할 수 있지요.

제 5조에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원망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평불만과 고통에 허덕이고 인생을 비관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감사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조항은 사은(四恩 : 天地恩⸳父母恩⸳同胞恩⸳法律恩) 에 대한 보은 감사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며, 지은보은(知恩報恩)의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며, 우주 만물은 서로 은혜의 관계로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상극 투쟁의 세계는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는 모두가 사은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 은혜를 발견하여 감사 보은의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감사생활 보다는 원망생활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개인이나 사회 모두가 평화 보다는 전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을 줄여서 <네 덕 내 탓>란 표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모든 잘못은 다 ‘나의 탓’이고, 잘 된 것은 모두 ‘네 덕’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어인가요? 그래서 <덕산재(德山齋)> 거실에도 어김없이 이 <네 덕 내 탓>의 표어를 모셔놓고 수시로 제 행동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그러면 저에게 찾아오는 재액(災厄)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액막이’를 할 수 있는 최고의 부적(符籍)일 것입니다. 우리 새해부터는 잘 된 것은 모두 ‘네 덕’이고 잘 못된 것은 ‘내 탓’으로 돌리면 아마 하는 일 일마다 만사형통(萬事亨通)이 되지 않을 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2월 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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