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일 칼럼]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는 혁명이란 존재했는가?

장애인의 날(4.20) 하루가 지났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다시 지하철 시위를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전장연은 지난 달 30일 시위를 중단하고 곧 집권여당이 될 이준석 당대표와의 생방송 토론까지 하면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비롯한 장애인 권리 증진을 위해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장애인의 날을 맞아 교통 약자의 이동편 증진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역을 찾아 이종성 의원과 함께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는 체험을 했다. 물론 이준석 대표는 장애인 교통수단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민주당 의원들도 휠체어 출근 체험을 하며 장애인 이동권에 증진에 대한 관심을 주장하기도 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휠체어 퍼포먼스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보장 요구를 결국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대신 체험으로 관심을 보여준 게 전부였다. 하지만 전장연은 시위를 중단한지 불과 한 달도 안돼서 오늘(21일)부터 다시 지하철 시위를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이준석 대표가 “시민을 볼모로 삼는 ‘비문명적’ 행태”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시위를 다시 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번에 이준석 대표가 쏘아올린 갈라치기는 숨겨왔던 혐오를 노골화하는 계기가 됐다. 원래 차별은 잘 보이지 않게 행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노골적인 경우다. 이동권 보장이 안되는 것 자체가 노골적인 차별이기 때문이다. 이준석 대표는 '혐오의 노골화'를 이슈화 하는데 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정치적 자산인지도 모르겠다.

전장연이 21일 '장애인 권리예산 민생 4법 책임 촉구'를 하며 출근길 시위를 재개했다. 사진=연합뉴스
전장연이 21일 '장애인 권리예산 민생 4법 책임 촉구'를 하며 출근길 시위를 재개했다. 사진=연합뉴스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는 혁명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혁명은 통상 생존권 투쟁의 성격이 강하다. 장애인들에게 이동권 보장을 위한 투쟁은 사실 혁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들에게는 이동권이 곧 생존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이들의 혁명을 비문명적이라고 깎아내렸다. 누가 비문명적인지 한 번 따져보자.

"선량한 시민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겠다는 방식은 문명사회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28일 전장연의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다음은 대법원이 2009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법률위반·도로교통법위반’에 대한 판결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집회나 시위는 다수인이 공동 목적으로 회합하고 공공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 다수인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라며 "의견을 전달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소음이나 통행의 불편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므로 집회나 시위에 참가하지 아니한 일반 국민도 이를 수인할 의무가 있다"라고 판시했었다. 여기서 수인 의무란 타인이나 국가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때에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인내해야 하는 의무를 말한다. 이준석의 주장대로라면 대법원은 비문명적 판결에 동조한 셈이다. 과연 누가 비문명적인가.

지난 해 9월 전국 5개 도시철도 노조가 구조조정 철회, 공익서비스 비용 국비 보전, 청년 신규채용 이행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예고하자 김부겸 총리는 “지하철은 ‘지친 서민의 발’”이라며 파업을 자제하고 대화에 임해달라고 말했다. 정치인의 언어였다.

이준석 대표의 발언은 문명국가에선 시민들의 불편을 야기해 뜻을 관철하는 방식은 허용돼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문명국가들은 과연 그럴까. 영국,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최근 철도노조 파업사례를 보자.

먼저 독일의 사례를 잠깐 살펴보자. 2021년 8월 독일 철도 기관사노조(GDL)는 조합원들의 파업찬반투표결과 95%의 찬성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화물열차 운행 중단을 비롯해서 여객운송열차 운행 중단 파업을 이어갔다. 파업이유는 낮은 임금인상률 때문이었다. 그러자 메르켈 총리는 “파업을 할 권리는 책임감 있고 균형있게 행사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책임있는 언어였다. 결국 독일 철도와 철도 기관사노조는 협상 끝에 협정임금 단일화 협약과 임금의 단계적 인상에 합의했다.

프랑스의 시위현장 사례를 보자. 2018년 11월 마크롱 대통령이 유류세 인상을 발표하자, 시민들은 노란조끼를 입고 거세게 항의했다. 노란조끼는 운전자 등 서민층을 상징하는 것으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이웃 나라인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등 주변국으로 번졌다. 그 유명한 ‘노란조끼 운동’이다. 프랑스 시위 현장은 살벌했다. 주변 상가 건물 유리창이 부서지고 차량이 불에 탔다. 이것이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위현장이다. 정치인들 중 누구도 대놓고 시위를 ‘비문명적’이라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경찰과 시위대 간에 몸싸움이 발생하고 검거되기도 했지만, 누구도 이를 비문명적이라고 낙인찍지는 않았다. 강자가 약자를 향해 문명과 비문명을 설교하는 것이야 말로 비문명이자 폭력이다.

이준석이 틀렸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고 평가하는 유럽국가들의 시위현장을 보면 우리 기준에서는 내전에 가깝게 보일 때도 있다. 시위현장 근처 상가들은 유리창이 깨지고 물건들이 도난당하기도 한다. 주변에 자동차가 불태워지고 때론 경찰차도 이걸 피하지 못하기도 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집회현장은 한 마디로 살벌하다. 반면 한국에서 시위나 집회현장은 얌전하다 못해 시위현장의 쓰레기까지 다시 주워가는 그야말로 선진 시민의식의 교본이다.

조경일 작가/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

이준석 당대표는 갈등의 외형적 현상에만 주목했다. 갈등발생의 본질은 애써 외면했다. 그래서 그의 얕은 철학과 편협한 사고에 대한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정치인들도 효과적인 시위를 위해 국회를 셧다운(이 행위 자체가 국민들을 볼모로 잡는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고 집회하는 마당에, 전장연의 시위를 비문명이라고 낙인찍고 갈라치기 하는 정치권의 발언이야 말로 몰상식하고 염치없는 행태다. 따라서 전장연의 시위는 마냥 독려할 수는 없으나 그들의 행위는 결국 정당한 것이다. 다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서 소수의 권리를 쟁취한 사례가 역사에 과연 있었을까. 우리 모두 수인 의무를 갖고 기꺼이 불편을 조금 감수하더라도 포용적 사회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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