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관우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불리한 환경속에서 극적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어 마침내 보위에 올랐지만 재위기간 중에 서인들에게 쫓겨나 지엄한 국왕에서 하루아침에 폐주(廢主)로 전락하고만 광해군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각본 없는 드라마라 하기에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극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1575년(선조 8년)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 2남중 차남으로 출생하며 휘(諱)는 혼(琿)이다. 

선조는 정실인 의인왕후로 부터는 원자가 없었으며, 후궁들로부터 광해군을 포함하여 전부 13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선조의 가장 신임을 받았던 왕자는 공빈 김씨의 경쟁자라 할 수 있었던 인빈 김씨의 장남 신성군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선조가 신성군을 특별히 아낀 것을 통하여 볼 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왕세자는 광해군이 아니라 신성군으로 책봉될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4월 13일 20만의 왜적들이 부산을 시작으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7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조선은 당시 왜적의 침입에 대하여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데 부산진성과 동래성의 함락을 신호탄으로 왜적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하여 마침내 한양을 위협하는 급박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조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본래의 계획을 바꿔서 4월 29일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되며, 그 이튿날 새벽 비가 내리는 가운데 왕세자를 비롯하여 100명의 호종을 받는 가운데 도성(都城)을 빠져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선조의 파천(播遷)에 절망과 분노를 느낀 백성들이 당시 도성에 있던 경복궁을 비롯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불태우는 차마 믿기 어려운 형국이 전개되었으니 왕이 도성(都城)을 떠나는 것에 대하여 민심의 분위기가 얼마나 격앙되어 있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도성(都城)을 떠난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게 되며, 이때부터 선조는 왕의 권한 일부를 광해군에게 주어 일종의 분조(分朝)가 이루어진다. 

구체적으로 선조는 평양에 머물고 광해군은 평안도, 함경도 지방으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심을 수습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된다. 

선조는 평양에서 다시 북으로 올라가서 영변을 거쳐서 중국과 국경이라 할 수 있는 의주까지 당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며, 한때나마 명나라로 망명하는 문제까지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선조가 백성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명나라로 망명까지 시도하였다는 자체는 군왕으로서 합당한 처신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은 이러한 부왕(父王)의 모습에 동요하지 않고 군사들을 지휘하여 왜적에 저항하였으며, 백성들은 이러한 광해군의 모습을 통하여 전쟁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느꼈던 것이다.이러한 우여곡절 속에서 7년간에 걸쳐 일어났던 전쟁은 마침내 종식되었지만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한편 생모를 어린 나이에 잃어야 하였던 광해군을 친아들같이 아껴 주었던 비운의 왕비 의인왕후가 결국 원자를 두지 못한 채 1600년(선조 33년)에 승하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에 선조는 의인왕후에 이어서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인목왕후이다. 

선조는 왕실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있는 위치에서 보위에 올랐기에 자신의 아들만큼은 적자(嫡子)로 계승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겠지만 이미 광해군이 왕세자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선조의 이런 결정은 장차 왕실에 불행의 단서를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인목왕후가 계비로 간택된 지 4년 후인 1606년 마침내 선조가 그렇게도 기다렸던 원자가 태어나니 이가 바로 비운의 왕자 영창대군이다. 이러한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왕실후계 구도에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하여 유영경을 주축으로 한 소북파의 세력들이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시도를 추진하였지만 뜻밖에 선조가 향년 57세를 일기로 승하하게 되면서 16년의 왕세자 시절동안 심적인 고통이 컸던 광해군이 마침내 선조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뒤돌아 보건대, 선조는 왕실의 직계가 아닌 방계출신의 왕족으로서 결정적으로 인순왕후의 지명에 의하여 보위에 올랐으나 재위기간 중에 기축옥사같은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 창업이후 최대의 전란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임진왜란이 종식된 이후 의인왕후가 원자를 두지 못한 상황에서 승하한 이후 계비(繼妃)를 맞이 하여 원자가 태어나는 기쁨을 맞이 하였지만 이러한 선조의 처신으로 인하여 왕실에 큰 불행의 그림자를 드리운채 결국 승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조의 승하는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니 만약에 선조가 영창대군이 어느 정도 장성할 때 까지 승하하지 않았다면 왕세자의 주인공은 광해군에서 영창대군으로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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