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海美邑城)을 아십니까?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해미읍성은 서해안 방어에 요충지로 조선 초부터 빈번하게 출몰하던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랍니다. 1417년 조선 태종 때부터 축성을 시작, 1491년에 완공했다고 알려졌으며 높이가 5m로 둘레 약 1.8㎞, 성 안 넓이가 6만 4,350㎡입니다. 현재 주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진남문(鎭南門), 오른 쪽으로 잠양루(岑陽樓). 왼 쪽으로 지성루(枳城樓)로 누각아래 큰문을 달았으나 북문은 문루가 없는 암문(暗門)형식이었습니다. 성 밖으로는 해자(垓字)를 파고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막았답니다.

탱자나무가 얼마나 무성하게 자랐는지 서문의 이름도 탱자나무 뜻이 내포된 지성루이다. 또한 음양오행설로 따져 본다면 북쪽 방향으로부터 음기가 밀려든다고 여겨 당시에는 궁궐에서도 북문은 천민이나 아녀자들만 이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어느 성이든 북문은 거의가 문루가 없는 암문형식이랍니다. 고려 말부터 서해안 일대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일이 빈번하자 조선 초부터 축성을 시작, 1421년 까지도 완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491년에야 완공, 1652년 덕산지역에 있던 충청 병마도절제사영이 주둔, 230여 년간 충청지역 병권을 행사했던 곳입니다.

후일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자 해미현 관아가 성내로 옮겨져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까지 겸영장(兼營將 : 각 도에 설치된 진영장 가운데 지방 수령이 겸직하도록 한 정3품의 관직)을 배치,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 12개 군과 현의 병권을 관장하던 곳입니다. 본래는 옹성이 2개소, 객사 2동, 포루 2동, 동헌 1동, 총안 380개소, 수상각 1개소, 신당원 1개소 등으로 매우 큰 규모의 성이었지만 수차례 전란과 세월 속에 모두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기록에는 성벽 주위로 탱자나무를 심어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을 막았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해미읍성은 조선말기 고종 때인 1790년경 부터 1886년까지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수천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려 온갖 고문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잔디로 뒤덮여 평온해 보이는 자리가 당시 신도들을 가두었다는 섬뜩 한 감옥터, 그리고 고문할 때 매달았다는 호야나무 한그루가 지나간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심하게도 앙상한 가지를 엄동설한에 내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진남문에서 성곽을 끼고 우측으로 약 400m쯤 가면 서문이 나오고 이 일대가 바로 순교지입니다. 산사람을 물속으로 밀어 넣어 수장시켰던 수구(水口), 돌바닥에 메쳐 죽였던 자리개돌 등이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 성당으로 옮겨졌으나 1986년 8월 29일 순교지로 기념되기 시작하면서 본래위치로 되돌려 놓았답니다. 여름철에는 성벽 아래로 심어놓은 담쟁이 넝쿨이 고풍스런 성벽을 뒤 덮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회색빛 감도는 성벽이 다소 스산해 보입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諡聖)하고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앙 활동의 모범으로 공경할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1985년 해미읍성 성역화 조성을 위해 서산 해미성당을 설립, 한국 천주교 순교자 기념사업을 본격화 했습니다. 1998년 말까지 약 2만 3100㎡의  부지를 확보하는 한편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순교 신앙 교육에 매진하여 2001년부터 서산 해미성당으로부터 독립하고 독자적으로 성역화 사업을 수행하고 있답니다.

또한 읍성 서쪽 들판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신도들을 산 채로 생매장 시켰던 곳으로 순교자들이 죽어가며 울부짖었던 예수, 마리아라는 기도소리가 `여수머리'로 와전되어 지금도 이 일대를 사람들은 여숫골이라 부르고 있답니다. 1935년 서산본당 범베드로신부가 생매장되었던 신도 유골들을 대거 발굴해 냄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뒷받침 합니다. 훗날 이곳이 순교성지로 인정받고 성지 조성사업에 따라 토지일부를 매입, 1975년 진둠벙으로 불리는 생매장터에 16m 높이 콘크리트 탑을 건립 순교자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서산군 해미면은 이름대로라면 상서로운 산과 아름다운 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200년만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한다는 천재, 정조 대왕께서는 사헌부 수장에게 서산현 일부 반가들이 무리를 지어 천주학을 전수받아 윤리에 어긋나는 언행을 일삼다니 엄중하게 다스려 반드시 그 뿌리를 뽑으라는 특별한 어명을 내립니다. 조정과 왕명을 어기면서 배교(背敎)를 죽음으로 거부했던 사학죄인 신도들에게 서문은 염라국의 대문으로 그야말로 운명의 기로(岐路)와도 같았을 것입니다.

오행방위 설에 해가 지는 서쪽은 부정한 것을 버리고 삿된 것을 방지한다는  따라 죄인의 처형장이 서쪽 문 밖이 된 것도 당연합니다. 정분문(靜氛門)으로 부르기도 했던 서문의 이름처럼 해미 읍성이 지금은 한적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적막함만 흐릅니다. 굳이 눈을 감고 들어보지 않아도 이기적인 통치자의 우치함으로 갖은 고문 끝에 생매장으로 죽어간 백성들의 핏빛 절규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 하다가도 간간히 찾아오는 관광객들 소음에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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