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부정론과 음모론 ①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한국사 근현대사에 대한 견해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더욱이 정 위원장의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식민지 정책에 적극 호응한 인물임을 떠올릴 때, 견해 표명 뒤에 마치 자신의 견해가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후려치는 회초리라도 되는 양, 공개 행보를 계속하는 데 이르러서는 말이 막힌다.

일본 우익의 발언을 듣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드는, 정 위원장의 견해가 뿌리를 두고 있고, 그런 견해를 내뱉게 만드는, 역사 부정론과 음모론 그리고 역사 수정주의라는 망령은 어떻게 생성되고 유포되고 생존할까? 이 글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과 같은 글이다. 이 번역글은 분량이 길어 편에 나누어 게재합니다 - 역자 주

역사 부정론과 음모론

다케이 아야카武井彩佳
1971년생. 가쿠수인여자대학 국제문화교류학부 교수. 독일 현대사․홀로코스트 연구. 『역사 수정주의―히틀러 찬미, 홀로코스트 부정론부터 법 규제까지』, 『‘화해’의 real politics―독일인과 유대인』, 『유대인 재산은 누구 것인가―홀로코스트에서 팔레스티나 문제로』 등의 저서가 있다.

■ 시작하며

요 몇 해, 역사 부정론과 음모론의 유사성과 친화성에 사회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먼저, 양쪽 모두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언설이며, 실제로 양자의 논리는 서로 비슷하다. 사실의 부인과 왜곡을 수반하고, 자의적인 ‘증거’ 선택, 때로는 날조조차 보이고, 그 결과 근거를 완전히 결여한 결론이 도출되는 점이 공통되어 있다. 양쪽 모두 현재 세계의 존재 방식, 말하자면 역사의 도달점으로서의 현재를 설명하는 틀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언설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확산 메커니즘이 발동하는 방식에도 공통성이 있다. 역사 부정론과 음모론에 찬성하는 집단은, 같지는 않지만, 겹치는 부분이 많다.

역사 부정론과 음모론이 오늘날 주목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의심이 제기되어, 우리의 인식을 뒤흔드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의 부정이든, 현재 일어나는 일의 부인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사실만을 선택해 받아들인다는 풍조는, 사회가 존립하는 기반을 무너뜨린다. 이것이 정치로 이입되면 정책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회가 근거 없는 주장을 실체화하는 방향으로 향하면, 2021년에 생긴 미국연방의회 습격 사건이 그랬듯이, 민주주의를 단숨에 위험에 빠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재, fact와 fake가 녹아드는 불안정한 공간에,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발견된다. 여기서는 역사와 사실을 부정하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거 없는 의심, 부인함으로써 야기되는 인식상의 동요, 말하자면 우리의 인지 취약성을 이용해, 정치적인 방향 설정이 시도된다고 하면, 어떨까. 트럼프 시대의 ‘alternative fact’ ‘post truth’는 바로 이러한 ‘동요’ 창출을 의도했다.

이제는 그것이 역사 기술에도 파고들어, ‘alternative history’가 대두하고 있다고, 문화사가 Valencia Garcia는 자신이 편집하고 저술한 『극우 수정주의와 역사의 종말Far-Right Revisionism and the End of History』(2020년)에서 지적하고 있다. ‘alternative history’라는 말이 미국의 ‘alternative right-wing’에서 온 것이며, 책 제목에 있는 ‘End of History’가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1992년)을 의식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로부터 30년 후,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경제가 사회 발전의 도달점으로서 ‘End of History’를 초래한 것인가, 라고 추궁하면, 오히려 alternative history를 초래했다는 것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는 역사 부정론과 음모론의 교착을 과거 사례에서 구하며, 거기에 공통하는 특징과 기능의 패턴을 밝히고자 한다. 이 글에서 ‘역사 부정론’은, 史實의 전면적 부정, 극단적인 왜곡, 또는 한 측면의 과도한 강조 같은, 의도적 또는 정치적인 역사 부인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역사 수정주의revisionism’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 용법은 상당히 폭이 넓고, 학술적인 역사의 재검증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근거 없는 ‘황당무계한 논설’까지 포함된다. 이것에 비해 유럽과 미국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으로 대표되는 명백한 史實 부정은, ‘부정론denial’ 또는 ‘否認주의denialism negationism’로 역사 수정주의와는 구별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역사 부정론’은, 상부 개념으로서의 ‘역사 수정주의’에 포함되지만, 좀 더 극단적인 역사 왜곡을 의미한다.

■ 등장 배경

음모론의 역사는,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론의 역사보다 길다. 사악한 세력 또는 소수 음모 집단이 이 세상을 전복시켜 지배를 기도한다는 주장은, 서양에서는 중세부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악마로 통하는 ‘적그리스도’로 시작하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Illuminati 같은 비밀 결사, 볼셰비키 혁명, 나치 독일에서는 ‘국제 유대인’ 음모 등, 일일이 들 수조차 없다.

음모론 연구의 일인자, 조셉 유스친스키Joseph E. Uscinski는, “음모론이란, 유력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소수 인원의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에 반해 비밀리에 행동했다/행동한다/행동할 것이라는, 신뢰할 만한 증거 없이 대상을 비난하는 인식을 가리킨다.”고 정의한다.(『Conspiracy Theories: A Primer』, Joseph E. Uscinski, 2020년). 전쟁, 공황, 재해 같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이나 상황을 음모의 존재를 가지고 설명한다. 음모는 음모 집단에 의해 잘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여긴다. 달리 말하면,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음모 때문이며, 폭로되면 더 이상 음모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비구름 사이로 한순간 흘러나오는 빛처럼, 배후에 있는 어떤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음모론은 실증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세상일은 얼마든지 음모 탓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시대나, 어디에서도 음모론은 존재했다.

여기에 반해, 정치적 태도로서 역사 수정주의의 등장은, 근대 국민 국가의 성립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 역사의 흐름이 ‘신의 의지’나 ‘운명’으로 설명되었던 시대에는, 역사 수정주의는 필요가 없지만, 근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국민 국가에서는 자신을 타자와 엄격하게 구별하고, 국민의 내력을 설명하는 ‘National History(國民史)’가 요구된다. 영토와 국민의 경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국민을 위한 역사’가 필요한 법이다. 여기서는 국가의 기원을 신화나 왕권에서 구하는 이야기는 이제 불충분하며,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었는지’(랑케)를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이 역사라는, 실증성의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National History는 ‘국민을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는 국민과 국가에 유익할 필요가 있다. 현재라는 시점에서 역사의 효용이 요구되는 곳에, 역사 수정주의가 생긴다. 사료에서 과거를 밝힌다는 과학으로서의 역사 기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실증을 포기하면 단순한 음모론이 되기 때문이다), 특정 史實을 골라서 선으로 잇고, 임의로 해석함으로써,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과거를 확보하는 수단이, 역사 수정주의인 것이다. 과거를 고쳐 써서 현재의 평가를 바꾸고, 이로 인해 미래도 바꾼다고 하는, 실리적 또는 미래 지향적 사상으로서 역사 수정주의는 등장한다.

따라서 정치 마당에서 역사 수정주의의 최초 실천을, 19세기 말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찾는 것도 납득이 간다. 프랑스 군부는, 유대계 군인 드레퓌스를 독일 간첩이라 하여 유죄로 단죄함으로써 국가의 위신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했다. 역사가 피에르 비달 나케Pierre Vidal-Naquet는 이 사건을 역사 수정주의의 ‘문학적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유죄의 증거가 날조되었을 뿐 아니라, 드레퓌스파 정치평론가가 쓴 『드레퓌스 사건사史L’AFFAIRE DREYFUS』에 맞서, 극우 단체 회원이 쓴 『드레퓌스 사건사 수정판』이라는 위서가 출판되고, 먼 훗날까지 유통되었기 때문이다.(『Assassins of Memory』, Pierre Vidal-Naquet, 1987년). 최근의 역사에 수정을 가함으로써, 정치적 방향 설정을 의도한 예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 역사 수정주의는 정치적 수단으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책임론에서 번성한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외교적 포위에 갇혀 전쟁으로 내몰렸다는 ‘독일 무죄론’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따른 거액의 배상금 지급에 대한 감면 요구와 표리일체였다. 독일 외무부는, 정부 견해에 가까운 역사가의 저작 출판을 지원해, 자국의 책임을 상대화하는 역사 기술記述이라는 침투를 도모했다. 현재로 말하면, ‘역사 전쟁’이 외교에 반입된 경우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역사 수정주의는 주로 독일의 전쟁 책임과 나치 범죄의 왜소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초는 나치 범죄자와 독일에 협력한 자가 자신의 죄를 부인하기 위한 언설이었지만, 1970년대가 되면, 전쟁과는 관계없는 일반인의 홀로코스트 부정이 등장한다. 그들은 ‘역사 수정주의자’를 자칭하며, 자기 의견은 “역사의 한 해석”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사 연구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史實의 명백한 부정은 역사 수정주의로조차 부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부정론이라는 말은 홀로코스트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제노사이드의 부정에 대해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법 규제 대상이 되는 것은, 주로 전자의 부정이다.

■ 이어지는 수맥水脈

음모론, 역사 수정주의, 역사 부정론 순으로 그 등장 시기와 배경을 살펴 왔는데, 이 세 개의 수맥은 이어져 있다. 음모론 안에서 후자 두 개가 파생, 또는 그 반대의 예는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는, 유대 음모론의 원형인 『시온 현자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이리라. 나치 시대, 볼셰비키 유대인이 독일 파괴를 기도하여, 독일은 생존을 건 ‘인종 전쟁’을 하고 있다는 국가적 프로파간다지만, 유대인 박해를 정당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 나치즘은 히틀러를 정점으로 하는 복잡한 다두 체제였기 때문에, 유대인 음모론이 홀로코스트를 낳았다는 따위를 말할 생각도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음모론적 세계관이 전후 독일의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론 속에 계승되어, 살아남은 것이다.

독일 침략 전쟁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하는 언설, 예를 들면 “독일은 유럽의 볼셰비키화를 막는 방파제였다” 따위는, 독일 보수층 사이에 계속 살아 있고, 1980년대 말의 역사가 논쟁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또한 “국제 유대인이 독일에 전쟁을 걸었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건국하기 위한 날조” 등, 가해 책임을 희생자에게 전가하는 언설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의 중핵을 이루어 왔다.

음모론과 역사 수정주의의 교착은,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영국을 돕기 위해 대독일 참전을 바라서, 일본의 기습 공격을 허용했다는, ‘진주만 공격 음모론’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것은 미국 고립주의의 혈통을 잇고, 스스로 ‘역사 수정주의자’를 자칭한 해리 엘머 반스Harry Elmer Barnes와 찰스 캘런 탄실Charles Callan Tansill 같은 역사가 들이 정식화했다. 일본에서는, 일본은 루스벨트에게 ‘걸려들어’ 진흙탕 전쟁에 나섰다는 문맥에서 끌어낸 것이 많다.

역사 수정주의자로서 반스와 탄실의 경력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한다. 반스는 『세계 대전의 기원The Genesis of the World War : an Introduction to the Problem of War Guilt』(1926년)에서, 유럽의 전쟁에 미국의 개입은 이익 집단의 유도 결과라고 하며, 독일에 개전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며, 전간기戰間期(1918년 11월 11일에서 1939년 9월 1일까지의 시대. 1차 대전 종결과 2차 대전 발발 사이 기간 - 역주)의 역사 수정주의의 기수가 되었다. 반스는 일종의 사회개량주의자이며, 사회가 전혀 좋은 방향으로 향하지 않는 것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에서 사회의 진로를 막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역사에 대해서도, 권력이 ‘진정한 역사’를 은폐해 ‘역사의 black·out’이 일어나기 때문에, 진실은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Perpetual War for Perpetual Peace: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Foreign Policy of Franklin Delano Roosevelt and its Aftermath』, 「Revisionism and the Historical Blackout」, Harry Elmer Barnes, 1953년, 1~78쪽)

말하자면 그에게는, 권력이 강압하는 ‘공적인 역사’를 수정하는 것이 역사 수정주의이며,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역사 수정주의자를 자칭하는 데에 모순은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음모론적 신념이, 역사 수정주의라는 표현 형태를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탄실은, 1952년의 저작 『뒷문 참전Back door to War』이 루스벨트 음모론을 대표하는 셈이다. 미국의 계획적인 참전이라는 해석은, 나치 독일의 전쟁 책임 부정과 표리일체다. 루스벨트가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였다면, 히틀러는 세계 전쟁을 회피하려고 한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탄실의 친독 경향은 이 저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나치 옹호를 이유로 1937년 American University에서 해고되었다.(『American Jewish History-Volume 105』, 「 The Pre-History of American Holocaust Denial」, John P. Jackson Jr, 2021년 4월, 33쪽)

반스와 탄실의 경력을 보면, 그들의 언설에 이익을 찾는 집단과의 관계성이 부상한다. 먼저 두 사람의 미국 정부 비판은 독일을 면죄하는 측면을 갖기 때문에, 독일 외무부로부터 신주단지 대접을 받고, 전간기戰間期에 유럽 강연 여행을 해달라는 독일 외무부의 초대를 받았다.

또한 탄실은, 1950년대의 미국에서 자유 지상주의 사상의 보급을 후원한 윌리엄 폴커William Volker 기금에서 미국 외교사 정리를 위한 자금 원조를 받았다. 결국 책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성과의 일부를 존버치협회John Birch Society의 잡지에 기고했다. 존버치협회란, 국제적인 공산주의의 음모를 주창하며, 냉전기에 많은 지지자를 과시한 우익 단체다. 한편 반스는, 데이빗 호건David Hogan이라는 하버드를 졸업한 젊은 연구자가, 히틀러의 면죄를 시도하는 『강요된 전쟁』(1961년)을 독일에서 출판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호건의 연구에 자금을 원조한 것도, 앞에서 말한 윌리엄 폴커 기금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역사 수정주의와 부정론은 음모론과 결합한다. 그 이유는, 역사 수정주의는 정치적 신념의 반영이기 때문에, 역사 기술로서는 설득력 있는 증거를 결여하고, 증거를 제사할 수 없기 때문에 실증의 필요가 없는 음모론이 원용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이 확산되는 것은, 자금을 후원하는 단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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