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공화국 제10대 대통령, 레몽 니콜라 랑드리 푸앵카레

지금 우리나라는 ‘겸손(謙遜)의 지도력’이 가장 필요한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독불장군들이 세상을 횡행하기 때문이지요. 그럼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겸손은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고, 마음을 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목격하거나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화(禍)의 근원은 겸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를 자초하는 것은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지 못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양보는 곧 존경과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의 사전적 뜻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 입니다.

그래서 첫째, 자신에게 겸손하고, 둘째, 남에게 겸손하며, 셋째, 세상사에 겸손한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지녀야 할 모든 덕의 으뜸인 원덕(元德)이요, 모든 일을 통하게 하는 형덕(亨德)이며,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이덕(利德)이고, 곧고 바른 정덕(貞德)이라고 합니다.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둘은 한참 싸웠고 마침내 승패가 결정됐습니다. 싸움에서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숙였지요. 그리고 어둑한 구석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반면 이긴 수탉은 암탉을 차지하게 된 기쁨과 승리에 도취해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큰소리를 지르며 자랑합니다.

“꼬끼오~! 이 세상은 이제 내 것이다.” 그때 그 소리를 듣고 독수리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눈 깜짝할 사이에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 가버렸습니다. 결국, 싸움에서 진 수탉이 슬그머니 암탉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일이 잘 풀린다고 절대로 자만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조심해야 하고, 또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지요. 《소학(小學)》에 「종신양로 불왕백보 종신양반 부실일단(終身讓路 不枉百步 終身讓畔 不失一段)」이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평생 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살아도 그 손해가 백 보밖에 안 되고, 평생 밭두둑을 양보한다 해도 한 단보(段步)를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뜻이지요. 결국 겸양의 미덕을 권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1860년 뫼즈 지역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한 뒤, 27세였던 1887년에 국민회의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소장파 보수주의자들을 지칭하는 '푸앵카레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다가 1912년에 수상으로 취임하며 1913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1860년 뫼즈 지역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한 뒤, 27세였던 1887년에 국민회의에 당선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소장파 보수주의자들을 지칭하는 '푸앵카레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일찌감치 두각을 드러내다가 1912년에 수상으로 취임하며 1913년에는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스의 제9대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이 어느 날, 자신의 모교 ‘쏠버대학’의 재학 시 은사였던 ‘라비스 박사’의 교육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많은 축하객이 자리에 앉았고, 라비스 박사는, 답사를 위해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비스 박사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객석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지난날 자신의 제자였지만, 지금은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제자가 내빈석도 아닌, 학생석의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놀란 라비스 박사가 대통령을 단상으로 모시려 하자, 대통령은 사양하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선생님이십니다. 저는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선생님을 축하해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히 선생님이 계시는 단상에 오르다니 요? 저는 선생님의 영광에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라비스 박사는 할 수 없이 그대로 단상으로 올라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훌륭하고 겸손하신 대통령이 나의 제자라니 꿈만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저런 대통령을 모셨으니, 우리나라는 더욱 부강해질 것입니다.”

순간 자리를 메운 많은 관중은 큰 박수갈채를 보냈지요. 그 후 푸앵카레 대통령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 없이 위대함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겸손을 스스로 배우지 않으면, 진리께서는 모욕과 굴욕을 안김으로써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겸손은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고, 마음을 숙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상대를 존중하고, 역지사지 마음으로 진솔하게 이해하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교만하게 거들먹거리면 모든 인연은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은 대개 겸손과는 거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독선적이고 안하무인(眼下無人)입니다. 덕과 겸양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데, 고집불통에, 잘못된 일에 사과할 줄도 모릅니다. 오로지 강력한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려는 오만에 빠진 것 같네요.

어는 단체, 어떤 조직을 막론하고 리더가 결코 잊어서 안 되는 한 단어가 있다면 겸손입니다. 지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조금만 출세하면 우쭐대고, 거들먹거리며, 칼자루 잡았다고 마구 휘두르는 것을 국민은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제66장에 「기선하지(其善下之)」라는 말이 나옵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 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강과 바다가 온갖 계곡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계곡물의 왕이 될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대중의 위에 서고 싶으면 반드시 겸손한 말로 자신을 낮추고, 정치를 하고 싶으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 하는 겸손의 덕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12월 7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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