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서울대학교 조사 위원회, 황우석 교수 사건 최종 조사 결과 공식 발표
대한민국사 연표
200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 10·26 사건 소재 영화 〈그때 그 사람들〉 명예 훼손 이유로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
대한민국사 연표
위성 DMB 사업자 TU미디어, 시험 방송 개시
대한민국사 연표
1999년    대전 지방 검찰청, 이종기 변호사 수임 비리 사건 관련자 331명 명단 최종 발표
대한민국사 연표
1991년    베니스터 미국 통계국 과장, 북한 인구 2,141만 명(1987년 말 현재) 추정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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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강만길·리영희·조승혁 등, <통일 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대한민국사 연표
1981년    조계종 원로 회의, 종단 종정에 이성철 스님 추대(1.20.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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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대한체육회(회장 박종규), 북한의 모스크바 올림픽 남북 단일팀 제의 거부
대한민국사 연표
1979년    공업용 접착제, 10대 청소년들 사이에 환각제로 사용돼 사회 문제화
대한민국사 연표
1975년    김치열 검찰 총장, 「시민의 소리」 전담 검사를 각급 검찰에 설치하라고 지시
대한민국사 연표
1964년    박정희 대통령,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연두 교서 발표
대한민국사 연표
1955년    미터(meter)제 실시
대한민국사 연표
1949년    이승만 대통령, 〈반민족 행위 처벌법〉 시행의 최소화 담화 발표
대한민국사 연표
1947년    미군 병사 5명, 호남선 열차서 한국 부녀자 윤간 사건 발생(1.8), 전국적 반미 여론 비등
대한민국사 연표
1946년    자동차 번호판(조선 OOOO번)과 검사증 변경
대한민국사 연표
1937년    조선일보사, 국내 첫 어린이 신문 〈소년조선일보〉 창간
근대사 연표
1931년    조선어 연구회, 조선어 학회로 개칭
근대사 연표
1930년    부산 조선 방직 공장 직공 2,270명, 동맹 파업 단행, 임금 인상, 8시간 노동 등 요구
근대사 연표
1925년    형평사 중앙 총본부, 백정 해방을 목적으로 형평사 정위단(正衛團) 설립
근대사 연표
1921년    이동휘, 상해에서 한인사회당 해체하고 고려공산당 조직
근대사 연표
1908년    차도선·홍범도 의병 부대 300여 명, 일본군 갑산 수비대·갑산 우체국 공격
근대사 연표
1904년    일본,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
근대사 연표
1894년    [음]전라도 고부 농민 봉기, 봉건 통치자와 일본 침략자 반대
근대사 연표
1883년    [음]인천항, 일본 조계지 획정
근대사 연표
1850년    [음]헌종의 어제(御製)를 교열하여 간행하게 함
조선왕조실록
1845년    [음]《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보완하여 간행하도록 함
조선왕조실록
[음]각 도 관찰사에게 민사·국사의 폐해 등을 보고하게 함
조선왕조실록
1831년    [음]경기 감영의 화폐 주조를 승인해 줌
조선왕조실록
1815년    [음]도성 안 거지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게 함
조선왕조실록
1805년    [음]백성이 힘을 펴도록 삼남의 대동목과 영동의 대동포를 돈으로 내게 함
조선왕조실록
1801년    [음]정순 왕후가 천주교를 금하는 하교를 내리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됨
조선왕조실록
[음]서얼 소통법을 실시하게 함

1784년 서울 수표교 근처에 있던 광암 이벽 세례자요한(1754~1785)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이윤하, 정약전, 정약용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으며 신앙공동체가 형성됨으로써 조선에 가톨릭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외부의 선교 없이 진리를 찾던 선비들의 탐구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교회 창설로 발아하여, 수 많은 모진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거쳐 현재의 가톨릭 교회로 성장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 <영혼의 횃불>과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역사소설 두 권에서 조선시대 초기 가톨릭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횃불>은 2013년에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에서 발간한 책으로서 가톨릭이 서구의 학문(西學)으로 탐구되기 시작한 때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2019년도에 발간된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또한 같은 시대를 조망하고 있으나 <영혼의 횃불>이 권철신 암브로시오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비중이 실려 있는 반면 이 책은 이승훈 베드로와 정약용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경직된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의 두터운 껍질을 깨고 천주교가 학문과 종교로 태동하고 뿌리 내리는 과정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과 진리를 향한 염원이 어우러져 격동하는 역사입니다. 역사소설은 기록에 근거한 내용에 상상을 덧붙여 저술되었지만 당시의 정치, 문화와 같은 시대 상황과 인물과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신앙선조들이 걸었던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무게와 자세를 비추어 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이승훈이 정약용에게 던진 물음처럼 나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책에 담긴 인물과 주요 사건]

​▶ 성호 이익 (1682~1763) 

   부친 이하진이 숙종 때 남인을 몰락시킨 경신(1680) 대출척사건으로 유배되고, 1705년 과거시험에서 낙방, 1706년 형 이잠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유학 경전을 연구하였는데, 공리공론보다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실학을 주장하였다. 서양 과학에 대해서는 극찬하였으며, 천주교에는 젊었을 때 긍정적이었다가 이후 부정적 경향으로 돌아섰다.

   문하에서 채제공, 이가환, 홍유한 등이 수학하였으며 권철신은 스무살 무렵에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다.

​▶ 권철신 암브로시오 (1736~1801)

   권철신의 증조부 권흠은 이조참판,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양근으로 낙향하였다. 부친 시암공과 모친홍씨 슬하에서 5남2녀 중 둘째,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래로 제신, 일신, 득신, 익신이 있다.

   권철신은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을 일찍 뒤로 하고, 학문 탐구에 정진하였다.

   1779년 여주 주어사, 퇴촌 천진암에서 이벽, 김원성, 정약전, 이승훈, 이존창, 권상학, 권상문, 이총억, 윤유일 등이 참석한 강학(학문과 관련된 자유 토론)을 이끌었다. 강학에서는 유교 경전뿐 아니라 이벽을 통해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 <서학범>, <십계진전>, <천주성교일과> 등 천주교 관련 서적을 서양의 학문(西學)으로 천주학을 접하였으며, 토론을 하며 진리의 원천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한다. 강학회에서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정약전, 권상학, 이총억 등은 <십계명가>를 지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1784년 10월 교부, 정통신학의 수호자, 도덕적 스승인 암브로시오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아 세례를 받았다.

   권철신이 덕망이 높았기 때문에 그가 영세한 후  가족, 제자, 마을 사람들과 멀리 사는 선비들까지 그를 따라 입교하였다. (아내 남덕임 마리아, 딸 권숙현 비비안나, 사위 이총억 토마스, 처남 남필용 요한,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 둘째 동생 제신 안토니오와 아내 박 수산나의 아들 상술 빈첸시오, 상립 요한, 권일신과 아내 안 바르나바 사이에 상학 스테파노, 상문 세바스티아노, 딸 권천례 데레사 등)

   천주교 박해 이후 권철신에게 유교 경전을 배우러 오던 서생들의 발길은 끊겼으나 양근에서는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와 아내 오숙혜 마리아 등이 언문과 교리서 등을 가르치며 신앙공동체가 활기차게 번성하였다,

   1797년에는 여주지방에 살던 노론 대가의 후예 김건순이 권철신을 찾아와 교리를 배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여주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권철신 암브로시오는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어 신문을 받다가 2월21일 순교하였다.

​▶ 이벽 세례자요한 (1754~1785)

   이벽의 5대조 이경상은 병자호란 후 볼모가 된 소현세자를 따라 중국에 갔다가 1645년 입국하였는데,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벽의 집안은 조부 이달이 호남병마절도사 부총관을 지낸 이후로 무관 집안으로 명성이 있었고, 부친은 이벽을 무관으로 출세시키려 하였으나 그는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이벽의 누이가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과 결혼하였으며, 그 인연으로 이벽은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과 교류하였다.

   이승훈이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갈 때에 천주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워 올 것을 권하였고, 이승훈이 돌아온 후에는 천주학을 탐구하며 이가환, 이기양을 비롯 주위에 전교하였다.

   1784년 가을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이윤하, 정약전, 정약용 등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첫 세례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됨으로써 조선에 처음으로 교회가 창설되었다.

​▶ 이승훈 베드로 (1756~1801)

   정약용의 누나와 결혼한 것을 인연으로 권철신 선생 문하에 드나들며 주어사, 천진암 강학회에도 참석한다.

   1783년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이 사신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이승훈도 수행군관으로 같이 갈 수 있었다. 북경에서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고 1784년 3월 교리서 등을 받아 서울로 돌아왔다. 

   이벽, 권일신, 이윤하 등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토론하였으며,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을 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과 1791년 진산박해 때 체포되었을 때 천주교를 사학으로 인정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정약용과 함께 천주학의 삼흉으로 몰리며 체포되었으나 교인들에 대해 함구 순교하였다.

​▶ 정약용 요한 (1762-1836)

   1775년 이승훈 베드로가 정약용의 누나와 결혼하여 인연을 맺었다. 1783년 초시와 회시를 통과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천주교를 배격하던 공서파에 의해 수 차례 견제를 받았을 때에도 정조의 두둔을 받았다.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 창설에 기여하였으며,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10인의 가성직제도에 포함이 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진산사건 때 천주교인임을 부인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이승훈과 함께 천주학의 삼흉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나 공식적으로 배교하고 유배되었다.

​▶ 권일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1751-1791)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동생으로서 권철신의 문하에서 학문하던 정약전, 이존창, 이승훈, 윤유일 등과 친교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1784년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성직제도에서 10인 사제 중 하나가 되어 전교에 힘썼으며, 양근지역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유항검에 의해 가성직제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자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하여 답변을 받았고, 중국에서 신부를 모시기 위해 노력하였다.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되자 교주로 지목되어 체포된 후 신문을 받고 유배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양근성지 성물)
(양근성지 성물)

​▶ 조선 천주교회 창설

   1784년 이벽, 권일신, 이윤하, 정약전, 정약용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조선에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이어 권철신, 이존창, 유항검, 홍낙민, 윤지충 등 양반들과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김종교, 지황 등 중인층도 세례를 받았으며, 천주교는 서울은 물론 지방에서 양반, 부녀자, 중인계급, 상인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전파되었다.

   양근지방 신앙공동체는 권철신과 권일신에 의해 형성되었고, 경기도 광주지방에서는 정약전과 정약종, 전주지방에서는 유항검, 내포지방에서는 이존창, 충주지방은 권철신의 처남 남필용, 진산지방은 윤지충, 포천지방은 권철신의 외사촌 홍교만에 의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 을사추조적발 사건 (명례방 사건)

   1785년 명례방(명동)에 있는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기도 모임이 열렸다. 기도 모임에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권일신, 권상학, 이윤하, 이총억, 정섭, 김범우 등이 참석하였고, 이벽이 모임을 주도하였다.

   여러 사람이 은밀히 드나드는 것을 수상히 여긴 포졸이 들이닥쳐 기도 모임을 적발하곤, 십자고상과 서책들을 압수하고 참석자들을 연행하였다. 형조판서는 그들을 조사한 후 풀어주었으나 집주인인 김범우는 구속하고 유배하었다.

   이 사건으로 양반 자제들이 천주학을 믿는다는 사실이 조정 관리들에게 처음 알려지고, 천주학을 이적지란(오랑캐의 난)이라고 하며 배척하였다.

  모임에 참석했던 양반인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용 등은 가문에서 배교를 강요 받게 되었다. 모임을 주도했던 이벽은 부친이 억압하여 집안에 감금을 당하였다가 이듬해인 1786년 봄 열병에 걸려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가성직제도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잠잠해질 무렵 서울의 신자들은 권일신이 머물던 매형 이윤하의 집과 최창현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였다. 1786년 교회 지도자들은 모임을 갖고 권일신, 유항검, 이존창, 홍낙민 등 10명을 사제로 임명하여 미사를 드릴 권한을 주었다.(가성직제도)

   유항검이 전주에서 전교하며 교리서를 탐독하다가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북경 교회에 문의하기로 하고, 1789년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윤유일 바오로를 파견하였으며, 북경 교회는 1790년 가성직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미사 집전을 중단하도록 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미사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다시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에 보내 조선으로 신부를 파견해줄 것을 요청하고, 제사에서 신주를 모셔도 되는지 문의하였다. 이에 대해 북경 교회는 조선에 신부를 파견하겠다는 것과 제사와 신주 모시는 것을 금한다는 답신을 전했다.

​▶ 신해년 진산박해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 바오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윤지충은 전주지방 신앙공동체를 이끈 유항검과 이종사촌이며, 정약전과는 고종사촌이다. 윤지충은 25세 때인 1783년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윤치충은 북경 교회의 제사를 금하는 사목서한을 지키기 위해 집안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조문을 온 사람들이 이를 보고 비난하여 윤지충과 외사촌 권상연 야고보를 고발하였다. 

   상소가 정조에게까지 올라가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윤지충과 권상연은 배교를 거부하고 천주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또한 교주로 지목된 권일신과 사학죄인으로 지목된 최필공, 양윤덕, 최인길 등 10여 명이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권일신은 모진 신문과 회유를 받고 유배되었으나 그 해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 주문모 신부 영입

   신해박해의 충격에도 조선의 천주교회는 좌절하지 않았다. 윤유일 바오로는 신앙공동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역관 최창현 요한을 만나 북경 교회에서 신부를 모셔 오는 것을 상의하였다. 1793년 윤유일 바오로는 지황 사바와 백요한과 함께 북경 교회와 접촉하여 1794년 겨울 국경의 감시를 뚫고 주문모 신부와 입국하여 1795년 초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 계동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머물던 주문모신부는 미사집전, 성세와 보례를 주고, 교리를 가르쳤으먀, 양근지방을 거쳐 전주, 내포지방으로 전교여행을 다녀왔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주문모 신부 체포령이 내렸다. 그러나 신자들의 기지로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고,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으나 신부의 행적을 말하지 않고 버티다가 형장을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남인 시파인 이가환, 정약용 등을 좌천시켰다.

   피신한 주문모 신부는 서울에서는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냈으며, 지방을 다니며 전교 활동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신자들의 순교가 이어지자 그해 4월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 정조의 죽음과 신유박해

   1800년 정조가 죽고 11살이던 순조가 왕이 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정순왕후와 가까운 벽파(사도세자의 죽음을 찬성)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벽파는 남인과 대립관계에 있었으며, 천주교인 중 남인이 많았던 이유로 더욱 가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1801년 2월10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을 체포하여 신문한 것을 필두로 권철신, 정약종, 최필공, 이존창, 홍낙민, 홍교만 등 수 많은 교인들이 고난을 받았다.

   신유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조선 가톨릭 창설 신앙선조들과 교회 지도자, 천주교인들이 박해 받아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777년    [음]홍국영이 언로를 열어 간언(諫言)이 나오게 할 것을 청함
조선왕조실록
1742년    [음]흉년에 구원받은 자를 노비로 삼을 입안을 진휼청에서 만들게 함
조선왕조실록
[음]전염병이 크게 번져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에 여제를 지내게 함
조선왕조실록
1740년    [음]고(故) 김창집·이이명의 벼슬을 회복하라고 명함
조선왕조실록
1735년    [음]공조 판서 이삼이 죽음
조선왕조실록
1734년    [음]모든 익명서를 물에 던지거나 불에 태우라고 명함
조선왕조실록
1733년    [음]도성의 쌀값이 급등하여 금주령을 내림
조선왕조실록
[음]도성의 쌀값이 오르면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자 금주령을 거듭 내림
조선왕조실록
1697년    [음]반역 모의에 연루된 이절·유선기 등을 처형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냄
조선왕조실록
1669년    [음]공사 노비 가운데 양민 처의 소생은 어머니의 신역을 따르게 함
조선왕조실록
1662년    [음]금주령을 내림
조선왕조실록
1641년    [음]인평 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함
조선왕조실록
1591년    [음]대마 도주가 표류한 조선인을 돌려보냄
조선왕조실록
1505년    [음]서책에 관한 일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함
조선왕조실록
1489년    [음]동지중추부사 이극기 죽음
조선왕조실록
1488년    [음]궁중의 내농작(內農作) 놀이를 간소화하게 함
조선왕조실록
1484년    [음]양성군 이승소가 죽음
조선왕조실록
1472년    [음]2품 이상 관원의 도성 밖 거주를 금함
조선왕조실록
1454년    [음]단종의 비로 풍저창 부사 송현수의 딸이 간택됨
조선왕조실록
1420년    [윤]봉상시(奉常寺, 제사나 시호에 관한 일을 맡은 관아)를 다시 설치하게 함
조선왕조실록
[윤]대마도 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귀속을 요청함
조선왕조실록
1400년    [음]집현전(集賢殿)을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침
조선왕조실록
1396년    [음]한양에 도교의 초제(醮祭)를 주관하는 소격전을 세움
조선왕조실록
1299년    [음]조인규 등 전왕의 심복들을 처벌함
중국사서
1260년    [음]관직 임명시 사양하는 글을 올리는 관례를 일부 없앰
고려사
1254년    [음]도성의 계엄을 해제함
고려사
1135년    [음]왕이 김부식을 서경 반적 토벌에 파견함
고려사
1034년    [음]상의국과 양반에 검약을 위한 교서를 내림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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