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지난해 필자는 총 61회에 걸쳐 컬럼을 연재했다. 마치 낙반 사고로 굴속에 갇힌 광부가 목슴을 걸고 괭이를 휘두르듯 글을 썼다. 올해는 어떤 페이스로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서재에 앉아 이번 주 스포츠 칼럼을 시작해본다.

지난 어느 날 필자는 조철제 전 대한복싱협회 전무의 초정 을 받고 중구 구민회관 행사장에 참관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조 전무에게 반가운 분을 인사 소개받았다.

이진삼장군 내외분과 조철제 전무(우측)
이진삼장군 내외분과 조철제 전무(우측)

제28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장군 이었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조 전무의 오랜 지우인 이진삼 장군을 취재하고 싶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에 걸쳐 표출(表出)했고 드디어 성사되었다.

1936년 2월 충남 부여 출신의 이진삼 장군은 청량리에서 육군 중위로 군 복무할 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조철제 전무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은 오랜 동지(同志)다. 육사 15기로 입학 1990년 육군참모총장과 체육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충청향우회 중앙회 총재역을 맞고 있다. 

한국체대 3년 선배 박성춘과 김민기관장(우측)
한국체대 3년 선배 박성춘과 김민기관장(우측)

동생인 이진백도 육군 소장으로 육군 정보 사령관을 지냈으니 두분 모두 자랑 스런 형제 장군이다. 특히 동생인 이진백 장군은 1979년 7월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제31회 세계군인복싱선수권대회에 수경사 단장으로 참관한 인물이다.

당시 수경사 인사참모였던 이진백 장군은 이 대회 밴텀급 결승에서 미국대표 로렌스 하위와 맞붙은 이재훈이 일방적인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3ㅡ2로 경기에 패하자 이재훈을 링에서 내려 오지 말라고 불호령을 내리면서 1시간 10분에 걸쳐 거센 항의를 펼쳤던 열혈남아였다.

1964년 동경올림픽 플라이급 8강전에서 조동기가 소련의 소로킨에 1분 6초 만에 실격패를 당해 항의한 51분. 1988년 서울 올림픽 밴텀급 경기에서 변정일 선수가 항의한 67분을 뛰어넘는 항의기록을 세울 정도로 역대급 편파 판정에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당시 그 대회에서 플라이급의 김지원이 금메달을 획득했고 밴텀급의 이재훈과 페더급의 김완수가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체대 9년선배 김종원 관장과 김민기관장(우측)
한국체대 9년선배 김종원 관장과 김민기관장(우측)

회관에는 전 복싱 국가대표팀 감독인 김승미 선생을 비롯 전 헤비급과 플라이급 국가대표를 지낸 김원전과 김지원 그리고 한국체대 5회 졸업생으로 남양주시 퇴계원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던 김종원 관장이 참관했다. 필자는 김승미 감독을 모시고 조철제 전무 이진삼 장군과 동석했다.

필자는 전직 지휘관인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김승미 감독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장군을 지켜보면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군인정신과 복싱에서의 감투 정신이 일맥상통(一脈相通)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재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군은 적진을 돌파와 함께 용감한 투지와 반격능력을 고취(鼓吹)시키기 위해 복싱을 교육기관의 정신학과로 채택 군부대지휘관들을 포함 전 장병에게 교육시켰다. 복싱과 군대는 묘한 공통분모가 묻어난다.

1970년 1월 윤필용 장군에 의해 수경사 복싱팀이 창단되어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등 수경사 출신 세계 챔피언 트로이카가 탄생 복싱 열기를 불태웠고 1979년 한차례 해체된 수경사복싱부는 1982년 수방사 복싱부로 재창단 유제두 챔프가 사령탑으로 내정되어 이승훈 백인철 유명우 장태일 이경연 박영균 등이 연거푸 탄생하면서 한국프로복싱은 전성기를 구축했다. 

현역시절 8체급 석권한 김민기 관장
현역시절 8체급 석권한 김민기 관장

이런 수방사가 1988년 중반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하면서 한국복싱의 몰락과 궤(軌)를 함께했다. 각설하고 필자는 행사를 마치고 김종원 관장과 함께 그가 15년째 운영하는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에 있는 복싱체육관을 찾았다.

마침 이곳 체육관을 방문한 구리시 인창동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민기 관장과 서울 청량리 경 흥 체육관에서 김종원 관장을 발탁 조련한 김남수 사범이 함께 담화를 나눴다. 1962년 남양주시 퇴계원 출신의 김종원은 경 흥 체육관 출신이다.

경흥 체육관은 강흥원. 최영철. 김종표. 강인길 등 굵직한 프로복서들을 포함 황철순 김인창 장흥민등 아마츄어 간판 국가대표선수들을 배출한 체육관이다. 이 3명의 복서는 모스크바 올림픽 국가대표로 발탁된 복서들이다. 한 체육관에서 올림픽 대표를 3명을 배출한 기록은 아마복싱 백년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김종원은 1978년 한영고에 입학 하면서 이곳 경흥 체육관에서 복싱을 수학한다. 한영고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박찬희를 위시해서 임병진 장흥민 김인창 장한곤 양설석등 기라성 같은 국가대표 복서들을 배출한 복싱 명문고다.

이곳 경흥 체육관에서 김종원은 한영고 복싱부 탄생의 산파역을 담당하는 김남수 사범을 만난다. 1953년 전남 무안 출신의 김남수는 경흥 체육관에서 선수 겸 트레이너로 윤창수 관장을 보좌하면서 실질적으로 체육관을 총괄한 인물이다. 특히 무명의 김종원은 김 사범의 세심한 지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김남수 사범과 김종원 관장(우측)
김남수 사범과 김종원 관장(우측)

일취월장한 김종원은 이후 각종 전국대회에 LF 급으로 출전 부산체고 권달원. 천호상전 신창석. 숭덕공고 김성길. 등 동 체급 최강의 트로이카와 예측불허의 열띤 타격전을 펼치면서 연달아 승전보(勝戰譜)를 올리면서 1981년 한국체대에 특기생으로 진학한다.

권달원은 1985년 제11회 킹스컵대회에서 김성길 역시 제13회 킹스컵대회에서 각각 금메달을 획득한 톱 복서였다.

5체급에서 국가대표를 역임한 치악산 호랑이 신창석 역시 1982년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간판 복서였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듯이 김종원 역시 조련사 김남수의 맞춤형 지도로 복서로서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한다.

김승미 전 대표팀 감독과 이진삼 장군(우측)
김승미 전 대표팀 감독과 이진삼 장군(우측)

김민기 관장을 지도편달한 상원체육관 이형수 관장도 김남수 사범처럼 많은 선수를 발탁 조련한 대표적인 지도자다. 권철 전찬중 최갑철등 유망한 프로복서들을 지도했고 장안중 복싱강사로 제15회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민기를 비롯 김석호 정해명 임경수 나학균 오영교 이상헌등 유망주들을 화수분처럼 쉼 없이 배출 장안 중학이 제5회 6회 김명복 박사배 2연패를 달성시킨 명장이다.

김민기는 본래 정통파 복서였지만 이형수 관장은 사우스포 로 전환 시켜 국내 최초로 8체급 석권한 복서로 재탄생시켰다. 이 관장은 선수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을 지닌 지도자였다.

김민기는 서울체고 1학년부터 김명복 배 밴텀급을 우승한 천재 복서다. 2학년 때는 제69회 전국체전과 제18회 대통령배 대회 페더급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졸업반인 1989년에는 제13회 김명복배 제5회 세계 청소년대회 선발전 제70회 전국체전을 휩슬며 라이트급에서 3관왕을 달성한다. 당시 김민기의 그림자도 밟을 경쟁자도 없을 정도로 그의 독무대 였다.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 장흥민과 김종원 관장(우측)
모스크바 올림픽 대표 장흥민과 김종원 관장(우측)

1990년 한국체대에 진학한 그는 라이트 웰터급으로 월장 숙적 김재경에 2연승을 거두며 국가대표에 발탁 1990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 1992년 중국 국제복싱대회. 1993년 태평양 국제대회에 모두 결승에 진출 은메달 3개를 획득한다.

김민기는 한국체대를 졸업하고 대전 중구청에 입단 1997년 전국체전에 슈퍼 헤비급에 출전 또다른 이정표를 세웠다. 8강에서 현역 국가대표이자 제4회 서울컵 우승자인 전남 대표 안정현(나주시청)을 잡으며 워밍업 을 마친다. 탄력을 받은 김민기는 준결승에서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헤비급 금메달 1991년 제6회 세계선수권(호주 시드니)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채성배 (호남대) 마져 판정으로 잡고 돌풍을 일으킨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아시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을 각각 2연패를 달성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슈퍼 헤비급)을 획득한 슈퍼스타 백현만. 김민기는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백현만 마져 일방적으로 난타 4회 RSC승을 거두며 대망의 금메달을 획득한다. 패한 백현만은 절망의 신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이면서 쓸쓸하게 퇴장했다.

이로써 김민기는 최 경량급인 39Kg 스몰급 에서 출발 91Kg인 슈퍼 헤비급 까지 마치 미장이가 벽돌을 쌓아 올리듯이 한 계단 한 계단씩 점령 8체급 석권이란 대기록을 창출 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1992년 12월 3일 개최된 제46회 전국선수권 미들급 결승전에서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승배(용인대)에 4ㅡ4 동점에서 종합점수 29ㅡ18로 패하자 복싱에 의욕을 잃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부터 국가대표선발전에 출전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현재 구리시 인창동에서 김민기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면서 2021년 소년체전에서 박규민이란 선수가 금메달획득과 함께 유스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2022년 경기체고 에 진학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작금의 한국복싱은 불황의 침체기를 넘어 동면상태의 빙하기다. 이런 난세(難勢) 일수록 뛰어난 일당백(一當百) 지도력을 겸비한 트레이너들의 출연을 기대해본다. 돈키호테를 쓴 작가 세르반테스는 용기를 잃은 자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린자 라 말했다. 긴 잠에서 깨어나 한국복싱이 생동감 있게 용솟음치길 바란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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