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 기간인 지난 23일 필자는 안타까운 비보를 접했다. 초등학교시절 함께 야구선수 생활을 했던 고장량 친구가 아내상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을 접하자 부랴부랴 열차를 타고 목적지 익산장례식장으로 떠났다.

군산상고 원광대 농협 상무에서 선수 생활을 한 고장량은 1986년 4월 원광대학이 창단 7년 만에 최초로 봄철대학리그를 석권할 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1990.91년 년 실업리그 연맹전에서도 수위타자에 올랐던 국가대표 출신의 타자였다.

이날 초. 중. 고 시절 함께 운동 을 했던 동료 선후배들이 대거 참석했다. 1983년 군상상고 재학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받은 한경수 와 농협시절 홈런왕을 비롯 실업연맹전에서 13타수 11안타 8할대 타율로 단일리그 타격부문 국내 신기록을 세운 오인식선수도 참석했다.

1976년 전국 회장배를 재패한 백인호와 조계현(우측).
1976년 전국 회장배를 재패한 백인호와 조계현(우측).

그러고 참석한 동료들 중 눈에 띄는 인물이 필자의 레이다 에 포착된다. 군산상고 연세대를 거쳐 1989년 해태에 입단 126승을 걷어 올린 조계현 이었다.

현재 KBO 총재 특별 보좌역을 맡으면서 협성대학 특임교수로 재직인 그와 가끔씩 통화도 하고 카톡을 주고받는 사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실로 오랫만에 해후를 했다.

이날 필자는 조계현을 비롯한 동료들과 무박 2일에 걸쳐 대화를 나눴다. 조계현은 1964년 3월 20일 전북 군산시 오룡동 899번지 3통 17반 달동네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계현 그는 TV 수상기가 드물던 그 시절 복싱경기나 야구경기가 방송되는 날이면 그 친구 집에서 속된말로 필자가 죽치고 앉아 경기를 관전한 깨복쟁이 친구다.

1912년 황해도 송화군 태생의 모친은 지고지순한 인자했던 분이었고 군산시청 호적계에 근무했던 선친 조래권 옹은 은 기골이 장대한 호탕한 성품이었다. 그의 집은 군산시 삼학동에서 위치한 필자의 집과 직선거리로 2백 m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1982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수훈상을 받은 고장량선수.
1982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수훈상을 받은 고장량선수.

1971년 우리는 군산남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계현이는 1학년 1반에 필자는 6반에 소속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복싱 플라이급)을 획득한 김광선도 계현이와 같은 1반에 속해 있었다.

1974년 초등학교 4학년 어느날 학교 교실에 문철웅 선생과 1972년도 황금사자기 대회 우승의 주역 야구선수 송상복 선수가 함께 교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야구를 해볼 사람은 거수하라고 말한다. 필자가 소속된 4학년 3반에는 조계현을 비롯 백인호 김덕이등이 속해 있었다.

그래서 54명이 신청을 했고 최종적으로 18명 창단 멤버로 뽑혀 정식 백넘버 를 부여받고 출정식을 치뤘다. 창단 후 1년 동안 남초등학교는 강대호 김평호 임동구(동국대)등이 활약한 군산초등학교와 백재우가 버틴 군산중앙초에 연이어 콜드게임패를 당했다.

그때 조계현의 포지션은 포수였다. 1년 후 감독인 송상복 선생에 의해 계현이는 투수로 포지션을 변경한다.

1983년 전국체전을 차지한 군산상고 투수 박찬홍과 조계현(우측)
1983년 전국체전을 차지한 군산상고 투수 박찬홍과 조계현(우측)

이는 삶은 속도가 아닌 방향임을 재확인시켜준 송 선생의 신의 한 수였다. 조계현은 우월한 피지컬 고무줄처럼 유연한 허리 듬직한 배짱에서 뿜어내는 돌직구는 바위처럼 묵직했다.

더불어 호쾌한 공격력을 겸비한 조계현은 우리 팀 공수의 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계현이가 학교에 나오질 않는다. 팀의 주축인 계현이가 이탈하자 문철웅 체육부장은 크게 상심했다.

며칠후 나타난 계현이를 향해 문 부장은 사정없이 뺨을 향해 후려갈겼다. 몇차례 얻어맞고 고개 숙인 계현이에게 문 부장은 한마디 던진다. 이 녀석 너 왜 그래? 그 때 계현이는 한마디를 내뱉는다. 선생님 우리 야구부원 전원에게 육성회비 면제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팀에 복귀하겠습니다.

계현이는 철없는 나이에도 선생님과 딜(협상)을 할 정도로 조숙한 학생이었다. 당시는 운동화 한 켤레도 구매하기 힘들어 고무신을 신고 운동하던 학생들도 제법 있을 때였다. 결국 문 부장은 교장에게 시그널을 보내 전 야구부원이 졸업할 때까지 육성회비(2400원)를 면제받으며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했다.

인간 조계현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또하나의 사례가 있다. 1988년 9월에 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할 대표팀명단 23명이 발표되었다. 그중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손발을 맞춰온 포수 장호익이 빠져있었다. 이에 벌컥 화가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은 조계현은 야구협회를 찾아가 장호익이 있어야 내가 공을 던질 수 있는데 왜 빼느냐 장호익이 빠진다면 나도 대표팀에서 제외해달라고 말하며 양자택일의 절묘한 승부구를 던진다.

결국 협회는 백기를 들고 조계현의 의견을 전격적으로 수용 장호익을 대표팀에 발탁한다. 이렇듯 물러설줄 모르는 투지와 승부 근성으로 그라운드의 싸움닭이라 불린 조계현은 그라운드 를 벗어나서도 의협심 강한 열혈남아였다.

1984년 2월 군산상고 졸업식때 부모님과 함께한 조계현(중앙).
1984년 2월 군산상고 졸업식때 부모님과 함께한 조계현(중앙).

군산남초등학교는 조계현이 투수로 전향하면서 전력이 강해졌다. 1976년 5월 20일 군산남초등학교는 제6회 협회장기 대회에 전북대표 로 출전한다.

그리고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결승전에서 조계현의 8이닝 완봉역투와 최양규의 극적인 끝내기 안타로 충북 이수초등학교를 1ㅡ0으로 제압하고 전국을 제패했다.

육성회비 면제로 사기가 충천한 선수들의 일치단결로 이뤄낸 금자탑이었다. 그해 우리 동기생들은 백인호 상철규 김광현 최양규 방병국 등을 제외한 대다수 부원 들은 학교방침에 따라 1년 유급하였다.

그리고 1977년 장충동 리틀야구장에서 벌어진 제7회 협회장배 야구대회에서 군산초등학교를 잡고 올라온 전남 서림초등학교를 조계현의 완봉역투에 힙입어 5ㅡ0으로 완파하고 대회 2연패를 달성 했다.

당시 2루수로 활약한 필자는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조계현의 커브를 현장에서 라이브로 감상하면서 우승장면을 지켜봤다. 

2008년 북경올림픽 대표팀 투수코치로 참관한 조계현
2008년 북경올림픽 대표팀 투수코치로 참관한 조계현

그리고 1978년 군산남중학교에 진학한 계현이는 1979년 5월 제8회 소년체전에 전북 대표로 출전 강원 대표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거두며 진가를 발휘한다.

졸업반인 1980년 6월 제35회 청룡기대회와 8월에 열린 문교부장관기 쟁탈 전국 중학 야구대회에서 연거푸 결승에 오르며 기염을 토한다. 비록 충남중과 문병권이 버틴 대구중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창출 했다. 1981년 군산상고에 진학한 조계현은 그해 5월 대통령 배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방어율 1,29의 짠물 투구를 하면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에서 지키기의 명수 군산상고란 새로운 닉네임 을 얻는다. 7월에는 미국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청소년대회에 선동렬 김건우와 함께 대표로 발탁 선발과 구원으로 등판하며 우승을 견인한다. 

군산 남초등학교 야구부원들 맨우측 문철웅 야구부장
군산 남초등학교 야구부원들 맨우측 문철웅 야구부장

9월에는 한일 고교야구 대회에서도 인상적인 투구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조계현은 1982년 2학년에 올라서며 최고의 전성기를 펼친다.

직구처럼 날아가다 힘없이 가라앉는 SF볼. 한치의 떨림 없이 타자 앞에 사뿐히 가라앉는 팜볼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청룡기와 봉황대기를 석권한다.

특히 제37회 청룡기 쟁탈 2회전에서 맞붙은 충암고와 대결에서 선발 조계현의 난조로 초반에 6ㅡ0 으로 끌려가던 경기를 13ㅡ9로 뒤집으며 승리한 짜릿한 역전드라마가 가장 인상 깊은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추격을 선포하는 2점 홈런을 때린 조계현은 지옥과 천당을 오가며 팀을 울고 웃 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당시를 회상해보면 전율과 희열을 느낀다.

그해 8월 27일 조계현은 휴식도 없이 펼쳐진 한일 고교야구 대회에 출전한다. 그리고 3게임에 연속등판 한국팀이 2승 1패를 거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조계현은 이때 무리한 연투로 인해 투수의 생명인 팔꿈치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9월에 벌어진 제36회 황금사자기 대회 2회전에서 군산상고는 부상당한 조계현 대신 이광우가 선발로 등판 배석곤이 완투한 경남고에 4ㅡ1로 패한다.

이때 한일정기전 때 조계현을 3게임 연투시킨 구수갑 (경북고) 감독이 도마에 올라 여론의 심한 뭇매 를 맞았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강한 승부욕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 단언하면서 구수갑 감독은 개인적으로 존경분이라고 말하며 그 당시 떠돈 풍문을 일축했다. 

필자와 KBO조계현 특보(우측)
필자와 KBO조계현 특보(우측)

1983년에는 팔꿈치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조계현의 군산상고는 천적 포철공고에 3연패를 당하며 제동이 걸린다. 특히 1983년 8월 14일 제13회 봉황대기쟁탈 3회전에서 맞붙은 포철공고 전 6ㅡ6 동점에서 9회말 1사 2.3루 찬스 에서 타석에 들어선 5번 염창무 에게 조계현은 적시타를 허용 7ㅡ6 으로 패하면서 8강행이 좌절되자 그는 순간 절망의 한숨을 토해내면서 무릎을 꿇는다.

필자가 지켜본 경기중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심기일전한 조계현의 군산상고는 그해 10월 벌어진 제64회 전국체전에서 숙적 포철공고를 따돌리며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금메달을 획득 대미를 장식한다. 최근 조계현 특보는 강의 나갈 때 주된 내용이 초.중.고.시절 회고담이라 한다.

그래서 조계현 KBO 특보의 컬럼을 쓰면서 초.중.고 시절 경기 및 일상 스토리 에 포커스 를 맞췄다. 필자는 향후 2, 3회에 걸쳐 조계현 특보의 연세대 재학시절과 해태타이거스 선수 생활을 주 무대로 컬 럼을 연재할 생각이다.

끝으로 다시 한번 아내상을 고장량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친구 곁에서 2박 3일간 머물면서 아픔과 슬픔을 공유한 조계현 특보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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