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글타자기 발명, 공병우기념관 짓고 그의 정신과 뜻 살리자

한글기계화 선구자요 한글운동가인 공병우 박사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정하는 2022년 과학기술유공자로 뽑혔다. 반갑고 기쁜 일이다. 이번 지정은 학문 업적과 연구개발 성과, 국가와 사회발전 기여도를 기준으로 뽑았다고 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공병우 박사는 자격이 넘친다. 

일찍이 공 박사는 1999년 특허청이 우리 역사상 위대한 발명가로 뽑은 ”세종, 이순신, 장영실 등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세종대왕이 만든 과학글자 한글을 과학시대를 맞이해 과학기계인 셈틀로 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고, 과학 기술자를 잘 대우해야 나라가 빛난다고 외치고 실천했다. 이제라도 공병우 박사는 과학 유공자로 그치지 말고 나라에서 겨레 스승으로 기리는 사업을 크게 할 분이다. 

2022년 과학유공자로 뽑힌 네 분 가운데 공병우 박사(왼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자료 사진
2022년 과학유공자로 뽑힌 네 분 가운데 공병우 박사(왼쪽)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자료 사진

공 박사는 1949년 한글 창제 원리를 따른 세벌식 한글속도타자기를 발명해 누구나 한글을 기계로 쓸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1980년 미국에 가서 한글을 셈틀로 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을 보고 여든 살이 넘은 분이 한글 특징과 장점을 살린 세벌식 조합형문서편집기를 개발해 가지고 귀국해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이찬진, 정래권, 박흥호 들 젊은이들에게 한글문서편집기를 연구하고 한글과컴퓨터 회사를 만들어 아래아한글문서편집기를 실용화하도록 이끌어 정보통신 선진국이 되는 길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미국의 마이크로문서편집기를 쓰지 않고, 제 나라 문서편집기를 쓰는 하나뿐인 나라가 되게 했다. 한글을 세종이 만들었고, 주시경, 최현배 선각자들이 쓰게 했다면 공병우가 한글기계화 시대를 열어서 한글이 세계 으뜸 과학글자임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안과병원을 개업한 의사로서 한글시력표와 콘택트렌즈를 처음 개발해 실용하게 한 일과 맹인용 한글타자기와 문서편집기 등 안과학과 맹인을 위한 발명과 개발을 많이 했다. 이렇게 한글기계화와 맹인들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준 것은 참 사람으로서 바르고 아름답게 산 성스러운 인류스승이다. 맹인재활원을 만들고 앞을 보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꿈을 갖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960년대 앞을 못 보는 강영우 학생에게 희망을 갖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최초 맹인 박사가 되어 이름을 날리게 한 것도 공 박사다. 가진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고, 죽어서 몸 까지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다 주고 의대생들 실험 실습에 쓰라고 기증하고 갔다. ”나는 내 식대로 살았다“는 그의 자서전은 참 삶 본보기이고, 온 인류가 본 밭아야 할 삶 지킴서이다.

1988년 미국에서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해 가지고 귀국해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이찬진, 정래권(오른쪽 사진)들 젊은이에게 연구하게 도와주고,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왼쪽 사진)에 사무실을 공짜로 주다. 
1988년 미국에서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해 가지고 귀국해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이찬진, 정래권(오른쪽 사진)들 젊은이에게 연구하게 도와주고, 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왼쪽 사진)에 사무실을 공짜로 주다. 

광복 뒤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 한글발전에 힘을 쓰는 한글학회에 안성 땅 수만 평을 기증하고, 우리 청소년 교육에 힘을 쓰는 기독청년회에 서울에 있는 금싸라기 같은 과수원 수천 평을 기증했으며, 돈 잘 버는 안과 병원일은 제쳐두고 한글기계화와 과학화를 위해서 많은 재산과 힘을 바쳤다. 한글학회에서 내는 ’한글 새소식‘도 처음에 공 박사가 타자기로 찍어주고 돈을 대주어 시작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사람과 좋은 일을 하는 단체에는 자신이 가진 돈과 힘을 아낌없이 쓰면서 저 스스로나 가족에게는 철저하게 검소했다. 건국 초기 미국에서 한글타자기 특허와 생산을 위해 미국을 다녀올 때에 자신의 가족에게는 조그만 선물하나 사오지 않고, 맹인용 지팡이가 있는 것을 보고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그걸 사다가 나누어주었다. 또 미국에 가보니 엠블런스란 움직이는 병원차가 있는 것을 보고 수입해서 안과가 없는 제주도까지 다니며 눈병 치료 봉사활동을 했다. 

이런 분을 어떤 이는 순진한 어린애 같다고 하는 데 거룩한 인간사랑 실천이었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이분 도움으로 출세하고 잘 살게 된 사람과 한글을 빛내 준 나라에서도 그 고마움을 모른 체 하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을 도와주고 참사랑을 베푸는 모습은 거룩했다. 그 당시 인도의 테레사 여사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다고 신문에 크게 보도한 것을 보면서 공병우 박사는 그 분보다 더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테레사 여사는 종교 기관에서 그 직분을 잘 수행했지만 이 분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진 것과 온 몸을 바쳐서 인류 사랑을 실천하고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었으며 모두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한글을 빛냈기 때문이다. 그때 미국에서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해 가지고 귀국해 한글문화원을 꾸리고 한글문서편집기를 개발하는 젊은이들과 한글운동을 하는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회장 이대로)에 모일 방을 공짜로 도와준 것도 무슨 보답을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 때 글쓰기연구회(회장 이오덕)에도 사무실을 주어 함께 활동을 했는데 이렇게 공 박사는 우리 겨레와 인류를 위해서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고 애쓰는데 정부는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빼고 한글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보면서 나보고 이오덕 선생과 손잡고 시민단체를 만들어 한글운동을 하자고 하셔서 어느 날 밝한샘, 송현 선생들과 그 논의를 하다가 공병우 박사를 모시고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공 박사 사무실에 가서 말씀을 드렸더니 “난 밥을 다 준비했으니 갔다 오세요.”라고 해서 보니 냄비에 고구마 두 개를 쪄놓고 있었다. 나는 그때 깜짝 놀랐다. 그 많은 돈을 한글과 맹인을 위해서, 그리고 한글기계화 연구와 발전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쓰면서 그렇게 검소하게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 박사는 안과학은 외국인도 연구하고 발전시키지만 한글기계화 연구와 발전은 우리가 안 하면 안 된다며 반포 댁과 집까지 오가는 시간과 기름 값을 아끼며 비원 앞 한글문화원 사무실에 군대 야전용 침대를 놓고 냉난방도 안 되는 그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한글기계화 연구와 한글운동을 하셨다. 그러면서 앞으로 한글로 정보통신선진국이 될 수 있으니 한글학회 회장부터 셈틀을 쓸 줄 알아야 된다고 그 귀한 셈틀을 한글학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러던 1993년 연세의료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가 퇴원해서 나를 급하게 부르시기에 댁으로 갔더니 “이 선생! 잘 아는 변호사가 있소?”라고 물으셨다.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더니 “한컴 회사를 꼭 살려서 한글기계화를 이루게 해야 하는데 내게 돈이 없소!”라시며 아들에게 준 병원 터를 다시 찾아서 한컴을 돕겠다고 하셨다. 

또 한글운동을 하는 나를 돕고 싶은데 가진 것이 사진첩 100권뿐이니 그걸 갔다가 팔아서 한글운동 비용으로 쓰라고 하셨다. 과학글자 한글을 살리는 길이 나라를 살리는 길인데 나라는 거들떠보지 않으니 당신께서 꼭 하고 돌아가셔야겠다는 뜻이었으나 나는 “예, 알았습니다. 제가 꼭 한글을 지키고 빛내겠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안심시켜드리고 변호사를 소개하진 않았었다. 아무리 한컴을 살리는 일이 중요해도 그건 아니라고 보아서였다. 그런데 그 다음 겨울 또 병원에 입원하셔서 말을 못할 때에 연필을 달라고 해 간신히 쓰신 쓴 글에 “민족, 영태는 언제 만나요. 민족문화”라고 쓰신 것을 보고 아들인 공영태 공안과 원장에게 민족문화를 위해 한컴을 도와주라고 유언을 하려고 한 거 같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 여름에 내가 셈틀을 독수리 타법으로 쓰는 것을 보고 밤 11시부터 12시까지 댁으로 오라고 해 자판을 보지 않고 300타를 칠 수 있게 만들어 내 스승님! 아~ 숨을 거둘 때까지 겨레를 걱정한 거룩한 분이다!

돌아가시기 전 말을 할 수 없을 때 연필로 쓴 마지막 글씨(왼쪽)와 공병우 박사가 쓴 자서전 표지(오른쪽)
돌아가시기 전 말을 할 수 없을 때 연필로 쓴 마지막 글씨(왼쪽)와 공병우 박사가 쓴 자서전 표지(오른쪽)

1991년 10월에 월간지 여성동아에 “내가 만난 공병우 박사”란 제목으로 쓴 글에 공 박사를 과학자라고 말한 것을 보고 ’과학자‘란 말이 꼭 듣고 싶었는데 이 선생이 처음 말했군요.”라며 매우 기뻐하셨다. 그리고 과학기술을 천대하면 나라 망한다며 한글문화원 건물 앞에 신문가판대와 같은 것을 만들어 놓고 신문에 과학기술 소식이 나면 복사해서 진열해 놓고 누구나 가져가라고 하셨다. 또한 만나는 사람마다 과학자와 기술자를 잘 대우하는 나라가 잘 된다고 침이 마르게 부르짖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번에 나라에서 ’과학발전유공자“로 인정했으니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인류애 정신, 과학글자 한글과 겨레를 사랑한 정신, 남다른 과학사랑 정신과 삶은 모두 본받을 일이고 한글을 빛내어 우리 겨레와 인류를 잘 살게 하려는 그 분 꿈과 뜻을 살려야 한다.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사무실이 한글문화원 안에 있던 1992년 한 월간지기 우리 활동을 보도한 것(왼쪽)과 1991년 10월 ‘여성동아’에 내게 원고를 청탁해서 공병우 박사 만난 이야기를 쓴 글(오른쪽)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사무실이 한글문화원 안에 있던 1992년 한 월간지기 우리 활동을 보도한 것(왼쪽)과 1991년 10월 ‘여성동아’에 내게 원고를 청탁해서 공병우 박사 만난 이야기를 쓴 글(오른쪽)

그래서 나는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을 알리지 말라고 했지만 돌아가신 것을 뒤늦게 알고 문제안 선생님에게 ”장례식은 안 하더라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언론에 알렸고, 1주기 추모식을 한글회관에서 하고 해마다 들아 가신 날에 뜻벗들이 모여 그 분 뜻을 기렸다. 그리고 한글문화원(박물관)을 짓게 하고 개관 기념으로 그 분 업적과 한 일을 알리는 특별전을 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돌아가신지 28년이 지난 오늘 정부에서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나 그에 그치지 않고 공병우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기념관을 지어서 거룩한 그 분 삶과 정신을 살리고 그 분 꿈과 뜻을 살려야 한다. 이제라도 그 분이 바라지 않은 일이라도 우리 겨레와 인류를 위해서 나라와 뜻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돌아가신 30주년이 되는 해에는 이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빈다. 이 일은 인류를 위한 시대사명이고 고마운 그 분에 대한 도리이기에 나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외친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가진 것이라고는 사진 작품집밖에 없다며 내게 팔아서 한글운동을 하라고 준 공병우 사진 작품집(왼쪽)과 한글명함 갖기 운동을 하자며 세벌식 글꼴로 공 박사가 내게 만들어 준 내 명함.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가진 것이라고는 사진 작품집밖에 없다며 내게 팔아서 한글운동을 하라고 준 공병우 사진 작품집(왼쪽)과 한글명함 갖기 운동을 하자며 세벌식 글꼴로 공 박사가 내게 만들어 준 내 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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