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노익희 기자= 그룹사운드 보컬의 원조로 불후의 명곡 ‘등불’의 주인공인 그룹 영사운드 유영춘 선생을 찾아 50년 음악인생에 얽힌 사연과 인생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는 유영춘 선생. 나이에 비해 한결 젊어 보이는 이유를 묻자 '음악때문일 것' 이라고 답했다. (사진= 노익희 기자)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하는 유영춘 선생. 나이에 비해 한결 젊어 보이는 이유를 묻자 '음악때문일 것' 이라고 답했다. (사진= 노익희 기자)

유영춘의 어린 시절

유영춘 선생 : 선친께서는 상공부 공무원이셨는데 그 시절에 피아노를 치셨다. 6.25 사변이 일어나 시흥 능곡으로 피난을 가시며 돈 될거 다 놔두고 아코디언만 하나 챙겨 가셨다. 악기를 다루시던 아버님은 미8군에서 연주를 하셨고, 퇴근하시며 콜라랑 맛있는 것을 가져다 주셨다. 

5살 때 돼지고기를 먹고 거의 죽을 뻔하다 살아나 1년 이상을 반찬 하나 없이 죽만 먹으며 살았다. 그 때 나를 걱정해 죽만 주셨는데 영양 섭취가 부족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아쉬울 때가 있다. 

이후 공주에 있는 조부모님 댁에 내려갔다. 조부모님 댁에 있으면서 금학초등학교 2학년 때 전국콩쿨대회에 출전해 상을 타기도 했다. 학교에서 학급 일을 거의 도맡아 하다 보니 불만이 생겼고,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 초등학교를 다녔다.

영사운드 2집 앨범 재킷​(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영사운드 2집 앨범 재킷​(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첫 그룹 ‘B-19’

유영춘 선생 : 선린상고를 다니며 학교 옆 화양프로덕션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에 매료됐고, 음악을 하기로 결정했다. 비틀즈 음악에 감동해 하루 8시간 이상을 노래하며 연습에 몰두했다. 비틀즈며 롤링스 등의 노래를 많이 연습했다.

아버지를 통해 미8군에 익숙하기도 했고 그 시절에는 그 곳 외에는 노래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미8군 오픈밴드 공연에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노래를 하게 됐고, 바로 스카웃 돼 ‘B-19' 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하숙비 내기도 빠듯한 돈을 받으며 노래를 하던 중 집에 들르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첫 음악인의 생활을 한 ‘B-19'를 그만두고 집에서 칩거하며 노래만 했다.

6인 멤버였을 당시 영사운드. 왼쪽 세번째가 유영춘 선생이다.(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6인 멤버였을 당시 영사운드. 왼쪽 세번째가 유영춘 선생이다.(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안치행 선생과 함께 한 ‘실버코인즈’

유영춘 선생 : 그 때 작곡가이자 작사가인 안치행 선생(현재 안타프로덕션 대표)을 만나 ‘실버코인즈’라는 그룹에 합류하게 됐고, 미군부대 오디션을 봤는데 최고의 개런티를 보장받으며 활동했다. 내가 보컬을 맡았고 기타에 안치행, 키보드에 장현종 등 5명 멤버로 구성됐다.

실버코인즈로 활동 중이던 1967년 미8군에서 송년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 공연이 늦어져 부대의 미군이 운전을 해줬는데 전복 사고가 났다. 그 일로 미군에서 그 당시로는 아주 큰 금액으로 보상하고, 최고급 악기도 구입해 줬다. 하지만 더 이상 악기를 다룰 수 없게 된 멤버와 머리를 다친 멤버도 있었다. 마음 아픈 일이다.

히파이브 멤버. 사진 아래 왼쪽에 유영춘 선생이 보인다.(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히파이브 멤버. 사진 아래 왼쪽에 유영춘 선생이 보인다.(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이후 ‘히파이브(He-5) 그룹’

유영춘 선생 : 화양에서 활동 중이던 여러 그룹의 최고 멤버들과 의기투합해 그룹을 결성하고 내가 제안해서 ‘히파이브'로 명명했다. 명동의 오비스캐빈(OB's CAVIN)에서 공연하며, 젊은이들의 낭만을 노래했는데 오비스캐빈은 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미8군 무대에서 대중들의 곁으로 다가가는 계기가 된 곳이다. 

히파이브의 첫 앨범 ‘초원’은 신세기레코드사를 통해 가수 양미란과 함께 냈고 연이어 4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다. 앨범 발표와 함께 오비스캐빈과 종로의 라틴쿼터, 이태원의 세븐클럽과도 전속계약을 맺어 바쁜 활동을 이어가던 중 베이스 멤버가 군에 가게 돼 김홍탁씨를 기타리스트로 영입했다. 그런데 또 다른 멤버가 이민을 가게 되면서 해체하게 됐다.

영사운드 멤버. 오른쪽 첫번째가 유영춘 선생이다.(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영사운드 멤버. 오른쪽 첫번째가 유영춘 선생이다.(사진= 유영춘 선생 제공)

‘영사운드’와 유영춘

유영춘 선생 : 운명이랄까 다시 안치행씨가 결성한 ‘영사운드’에 합류했는데 이전의 무리한 일정에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서인지 신경쇠약과 함께 영양실조가 왔고 정신을 잃어 거의 식물인간 상태가 됐었다. 3일 만에 깨어났는데 부르던 노래들 멜로디도 가사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개월 요양하며 노래를 다시 배우다시피 연습해 영사운드에 복귀했고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 때 노래만 잊은 게 아니라 과거의 많은 기억들도 지워진 거 같다.

1972년 ‘등불’을 발표하고 인기가 엄청났다. 당시 150만장이라는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해 이후 신중현씨도 이봉조씨도 나를 찾아왔고 솔로 제의를 받았다.

요즘은 그룹을 하면서 솔로 앨범을 내곤 하지만 그 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래서 거절했다. 그룹은 단순히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엄청난 연습을 필요로 한다. 멤버 하나하나가 모두 베테랑이다.

유영춘 선생이 2019년 청춘음악회에 출연해 열창하고 있다.(사진= 방송 화면 캡쳐)
유영춘 선생이 2019년 청춘음악회에 출연해 열창하고 있다.(사진= 방송 화면 캡쳐)

선생님. 앞으로 계획과 못다 하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유영춘 선생 : 1976년에 영사운드 리더가 되면서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13장의 음반을 냈는데 곧 14번째 음반 ‘좋아 죽겠어-콩깍지’(가제)가 발매될 예정이다. 앞으로 2장 정도 앨범을 더 낼 계획도 있다. 새벽까지 공연할 때도 있는데 노래는 거의 나 혼자 부르다보니 나이도 있고 힘들지 않다 할 수는 없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아들이 2명 있는데 첫째는 음악에 관심이 있었으나 지금은 음악을 하지 않는다. 글쎄.. 음악을 하는 아들이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모두 건강하게 각자의 자리에 잘 있으니 감사하다. 노래는 나의 인생이자 나의 동반자다.

지난해 인사한마당 공연을 마치고 포즈를 취하는 유영춘 선생(중앙)과 출연진들 (사진= 노익희 기자)
2022년 10월 인사한마당 공연을 마치고 포즈를 취하는 유영춘 선생(중앙)과 출연진들 (사진= 노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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