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 다시 사는 ‘죽음과 삶의 사 생관(死生觀)’을 확립하셨는지요? 며칠 전 친구 한 분으로부터 <향노학(向老學)>이라는 글을 받았습니다. 이 노년 학은 노인 문제를 취급하는 학자들의 연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문의 실천 덕목 아홉 가지 가운데 맨 마지막 조항이 노인은 <죽음에 대하여 자주 말하지 마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노인일수록 죽음에 대한 연마(練磨)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반론을 제기(提起)했지요.

우리 <덕화만발 카페>에 <이언 김동수 교수 시 문학 방>이 있습니다. 이 방의 방주(房主)이신 이언 김동수 교수는 오랫동안 ‘미당문학회’를 이끄시다가 얼마 전부터는 ‘전라 정신연구원 이사장’직을 맡고 계신 시인이십니다.

우리 이언 김동수 교수님이 마침 <죽음과 삶의 사생관>에 관한 글을 올려 주셨기에 이 글을 널리 공유(共有)하는 것으로, 노인일수록 죽음을 연마하는데, 도움 되면 면 좋겠네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죽음을, 그림자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데아(Idea:사물의 원형,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로 보았다. ‘존 번연’도 『천로역정』에서 ‘죽음은 감옥에서 나와 궁궐로 들어가는 통로, 폭풍의 바다에서 헤어 나와 안식의 항구로 들어가는 것’이니, 죽음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門)이라고 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렇게 의연하게 독 배를 들 수 있었다. 이는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연속 성으로 보는 불교의 윤회(輪廻)나 기독교의 부활 론 과도 맥을 같이 하는 연기론 적 세계관이다.

그러기에 그가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사후(死後) 세계에 가서도 그에 값 하는 생(生)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잘 보낸 하루가 편안한 잠을 불러오듯, 잘 보낸 인생이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인과응보론(因果應報論)과도 같은 맥락이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또 다른 곳으로의 이사’로 보면서, 이러한 삼라만상의 운행 과정을 생 멸 법(生滅法)과 윤회(輪廻)로 설명하고 있다. 만상은 한번 생(生)하면 반드시 멸(滅)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자연의 이법(理法),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生滅)의 법칙을 겸허히 수용하게 된다면, 이별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증산도(甑山道)에서도 사람이 지상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면, 혼(魂)은 육신을 떠나 천상에 올라가 신명(神明)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마치 매미가 허물의 육체를 벗고 천상의 신명으로 다시 살아가듯…. 그러니 죽음이 의미 없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이 그대로 모이고 쌓여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인선과(善人善果)요 악인악과(惡人惡果), 생시에 선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고, 악행을 많이, 저지르면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을, 가지고 온다. 춘하추동의 순환도 이러한 자연의 이법(理法)에 따라, 봄에 뿌린 씨앗이 가을에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른 새싹이 돋아나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생(生)이 시작된다.

이러한 연기와 윤회로 우주 만상이 생멸을 거듭하며.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끊임없이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껏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태어나서 죽어가는 허무적 생사관(生死觀)이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생성 적 사생관(死生觀)으로, 죽음의 본질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남은 생을 차분하고 의연하게 맞이하고자 한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일 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을 일 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우 내 객토(客土)도 하고 농사 준비 기간으로 보내지만, 게으른 농부는 겨우내, 움츠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합니다. 그러나 일 년 후 추수에서 두 농부의 차이는 엄청날 것입니다.」

- 김덕권, 「죽음의 보따리」에서-

죽음은 궁극적으로 소멸이 아니라 생시(生時)의 업보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 만해도 그의 시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고 했듯이, 영적으로 깨친 자들에게 있어 ‘죽음은 다만 육신이 무너진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것은 절망이 아니고 또 다른 희망의 출발이다.

태어나 사라지는 ‘생사(生死)’의 세계가 아니라,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사생(死生)의 자연관’, 그러기에 내세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남은 생을 즐겁게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 앞에서, 더욱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되지 않을까 한다.】

어떻습니까? 이언 교수님! 저도 그리 알고 편안하게 그 문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걸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이라 하지요. 이 글 <죽음과 삶의 사생관(死生觀)> 모셔다가 덕화만발에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고맙습니다.

지리산 흑곰 이언 교수님이 답글을 주셨습니다.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다 덕 산 선생님의 가르침 받고 조금씩 깨우쳐 가는 중입니다.」

우리, 노인이 되어 갈수록 어서 어서 죽음에 대해 연마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에 이르러 종종 걸음을 치지 않는 것이지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3월 24일

덕 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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