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승리’는 중국 현대문학의 태두 노신(1881~1936)의 단편소설 「아Q정전」에 뿌리를 둔 용어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날품팔이 노동자 아Q는 비루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어려운 현실을 용감하고 주체적으로 바꿔나가기보다는, 허황한 망상 속으로 비겁하게 도피하는 ‘정신승리법’에 수동적으로 의존함으로써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발버둥 친다.

노신은 제국주의 열강들에 무기력하게 침탈당한 후과로 인해 식민지와 다름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중국 대륙의 비극적 상황을 아Q의 한심한 모습에 빗대어 풍자적으로 고발함으로써 당대 중국인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했다.

문화원 앞에서 엠비언트 광고를 바라보는 워싱턴 시민들.(사진=주워싱턴한국문화원)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해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일행이 한미 양국이 북한 핵무기에 대응해 미군이 보유한 핵병기들을 사실상 공유하기로 합의했다고 자랑스럽게 선포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자신만만하게 집약됐다는 이른바 「워싱턴 선언」은 단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빛이 바래고 말았다. 에드 케이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동아시아ㆍ오세아니아 담당 선임국장이 미합중국은 대한민국과 핵무기를 공유할 의사가 없음을 미국 현지에 주재하는 한국 언론사 소속 특파원들에게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모양새가 잔뜩 구겨져 머쓱해진 윤석열 대통령 일행은 미국과 핵을 공유하기로 합의한 게 사실이라고 이내 해명하며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이후 벌써 몇 시간째 ‘확장억제’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우리나라 정부 당국자들의 구구절절하고 알쏭달쏭한 설명이 추레하고 구질구질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 극렬 지지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은 곧장 눈치를 챘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솝 우화에서 묘사된 양치기 소년처럼 또다시 만인의 웃음거리가 돼버렸다는 걸. 윤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며 유창한 영어 발음을 뽐냈다고 하는데 윤석열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믿음이 다시금 확장적으로 억제된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와 효과가 있을지 영어 실력이 신통치 않은 필자로서는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겠다.

기괴하고 이례적이다. 외국군대의 침략을 허용해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분을 상실하지 않는 한에는 외치에서의 오류로 말미암아 정권이 총체적으로 몰락하는 사태는 매우 드문 경우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윤 정권은 대외정책에서의 연이은 헛발질의 여파와 영향으로 정권이 급속도로 붕괴되는 중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굴욕적 양보를 일방적으로 거듭했다는 의혹을 자초한 까닭에 민심의 공분을 샀다. 중국과 러시아를 향해선 요동 정벌과 나선 정벌을 각기 방불할 만큼의 느닷없는 초강경 노선을 천명했다가 며칠 만에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미국과의 외교에서는 이미 2년째 심각한 난맥상이 계속 빚어지고 있다. 작년에는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를 둘러싸고 전국민에게 느닷없이 듣기 평가를 강요하더니, 올해에는 미국과 핵을 공유하기로 했다고 성급하게 으스댔다가 미 행정부의 일개 국장급 인사에게 제대로 면박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를 뜻하는 윤핵관들 가운데 한 명인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이 주군의 어이없는 실언을 두둔ㆍ옹호한답시고 우리나라 국민은 물론이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기자를 상대로까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다가 들킨 사건은 제3자인 나조차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유상범은 전형적인 검찰 출신 정치인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친정체제 구축을 목적으로 이준석 전 대표를 잔인하게 숙청하는 과정에서 최일선 돌격대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권 수뇌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도 믿기 힘든 형편이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군사독재자의 대명사 전두환조차 이 정도로까지 국민적 불신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던 듯싶다. 대통령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고 민중이 인식하는 상태에서 정부여당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윤 대통령에게 지금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과제는 한미동맹 복원도, 야당을 겨냥한 대대적 검찰 수사도, 노동개혁ㆍ교육개혁ㆍ연금개혁의 소위 3대 개혁도 아니다. 대통령에 대한 땅에 떨어진 국민의 신뢰를 더 늦기 전에 회복하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 믿음을 되찾는 데는 별다른 열의와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외려 정신승리에만 골몰하는 형국이다.

윤 대통령이 미국과 합의했다는 핵무기의 사실상의 공유를 필자는 정신상의 소유, 즉 ‘정신소유’로 표현ㆍ규정하련다. 남들에게 처참하게 폭행당한 아Q는 자신이 되레 타인을 구타하고 있다는 기상천외한 정신승리법으로 스스르를 위안하려 들었다. 윤 대통령은 실패로 점철된 외교를 남의 것을 내 것이라 우기는 정신소유법을 동원하면서까지 화려한 성공을 거둔 것 같이 포장하려 애쓰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직성이 결정적으로 의심받기 시작한 계기는 그가 앞에선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의 당무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다고 얘기하면서 뒤에서는 윤핵관들에게 이준석 제거를 부지런히 독촉해왔음이 백일하에 드러난 체리따봉 이모티콘 사건이었다. 체리따봉은 인간 윤석열의 위선과 부정직을 표상하는 아이콘으로 정착됐다.

한미가 핵을 공유하기로 합의한 적이 없다는 미 행정부의 단호하고 명백한 입장 발표는 윤석열 대통령의 무능과 무지를 불가역적으로 확인시켰다. 그나마 대통령이 미국으로부터 소유권을 확실하게 이전받은 물건이 불행 중 다행으로 한 가지는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백악관 앞마당에서 진행된 윤석열 대통령과 영부인 김건희 여사 환영식에서 윤 대통령에게 슬며시 건네준 제로콜라였다.

열량이 없다고 선전되어온 제로콜라는 윤석열 정권의 영양가 빵점의 부실하고 실속 없는 외교를 상징적으로 웅변해주는 음료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터이다. 체리따봉과 제로콜라는 내치에서는 정직하지 않았고, 외치에서는 유능하지 못했던 윤석열 정권의 축도로 각각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윤 대통령 부부가 외국만 나갔다 하면 지지율이 걷잡을 수 없이 폭락하기 일쑤다. 윤석열 대통령이 평범한 목장 수준이 아닌 거대한 국제사회 차원에서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만 탓이다. 만약 현재의 용산 대통령실에 윤석열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해주는 참모가 있다면 대통령 집무실에 잠깐 들어가 이와 같은 내용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윤 대통령의 책상 위에 살짝 올려놓고 나오길 부탁하는 바이다.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