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계와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김남국 의원의 코인 사태가 단연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이지만 젊은 사람이 권력과 재물, 양손에 떡을 움켜쥐려 하였으니 체해도 단단히 체한 것 같습니다.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자경문(自警文)>의 한 구절로,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 년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니라.>는 뜻이지요.

<자경문>은 수행자가 자신을 경책하는 좌우명입니다. 수행자는 부드러운 옷과 좋은 음식을 수용해서는 안 되며, 자기 재물에 인색하지 말고 남의 물건을 구하지 말며, 좋은 벗만 가까이하고 나쁜 벗과는 어울리지 말라는 등의 열 가지 부문을 들어서 경책하고 있습니다.

마침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의 글에 이 <삼일수심 천재보>라는 글이 있어, 이를 함께 인용해 마음공부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소년은 15살이었습니다. 하루는 마을 근처에 있는 절에 놀러 갔습니다. ​거기서 동자승을 만났습니다. 동자승은 그에게 명구(名句) 하나를 읊었습니다. ​“삼일수심은 천재보요, 백년탐물은 일조진이다.”

​소년은 상당히 조숙했었나 봅니다. 그는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고, 큰 감동도 받았으며, 자신이 갈 길이 바로 이 길임을 직감했습니다. ​소년은 그 길로 몰래 집을 나와 출가를 하는데, 15살 소년의 자발적 출가였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냐고요? 불교계에서 강백(講伯)으로 이름이 높은 ‘무비(無比)’ 스님입니다. 15살 소년은 이제 79살의 노승이 되었지요.

예전에 가톨릭에서 주관한 ‘죽음 체험 피정’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줄지어 선 참석자들은 자기 차례가 되자, 관 속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이 닫히고 그 속에서 5분 가량 있다가 다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관에서 나온 사람마다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걸 쭉 지켜보던 저는 궁금해졌습니다.

저들은 무엇을 본 것일까? 저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 걸까? ​저는 취재 수첩과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줄을 섰지요. 제 차례가 왔고, 저도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곧이어 관 뚜껑이 닫혔습니다. ​관 뚜껑과 관, 그 사이로 실처럼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기에 아주 캄캄한 어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관 뚜껑 위로 천이 덮였습니다.

그러자 빛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제가 누워있었습니다. ​‘아~, 여기가 무덤이구나!’ ​공간은 철저하게 분리돼 있었고, 관 속과 관 바깥은 달라도 아주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관 바깥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이 안으로 가지고 올 수가 없구나.’

관 바깥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요. 가족, 재물, 나의 친구, 내가 하는 일, 내가 늘 보고 읽는 책, 내가 아끼는 이런저런 물건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물건도,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순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남는 걸까? 관 속에 누워있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 물음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그때 비로소 알겠더군요. ​“아! 마음이구나. 죽어서 관 속에 누운 나에게 남는 것은 마음이고, 이 관 속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것도 마음 뿐이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살아야지, 마음을 잘 가꾸며 살아야지.”

​‘사흘 닦은 마음이 천년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구절에 무척 공감이 갔습니다. 왜냐구요? 죽은 뒤에 내가 가져가는 것은, 마음 뿐이라는 걸 절감했으니까요. ​아무리 빛나는 보석과 좋은 자동차도, 좋은 집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오직 하나, 나의 마음만 가지고 갈 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비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불교는 마음 닦는 종교 즉,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무비 스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인간의 삶에서 맛봐야 하는 굉장한 기쁨, 엄청난 절망, 잊지 못할 고통 앞에서는 그 차이가 확 달라진다.” “도인일수록 ‘무게’ 잡지 않는다. 정말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을 가진 도인은 더 인간적이다.​ 더 슬퍼하고, 더 기뻐하지만, 그 슬픔과 기쁨에 젖지 않을 뿐이고, 기뻐하되 기쁨에 물들지 않고, 절망하되 절망에 물들지 않는다.

​물론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그런데 그 분노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 되겠나. 슬픔과 고통과 절망 속에 있어도 ‘나[我]’가 상(傷)하는 일이 없다.”

​‘그런 삶은 어떤 삶일까?’를 다시 여쭈었습니다. ‘​가뿐한 삶’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살기가 아주 수월한 삶이 되며, 삶도 가뿐하고 죽음까지도 가뿐하게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생사 해탈이 대단한 것이 아니며, 그게 바로 생사 해탈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비 스님은 자신이 입적할 때 다비식(茶毘式)도 않겠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탐욕에 젖어 만고(萬古)에 오명(汚名)을 날릴 것인가, 아니면 욕심을 버리고 공덕을 쌓아 영명(英名)을 세상에 떨치며, 최고의 인생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5월 16일

덕 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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