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오늘 YS 국가장]

김영삼 전 대통령(YS) 서거를 계기로 진행되고 있는 YS 공과(功過)에 대한 ‘재조명’ 작업 귀착점이 박근혜 대통령으로 향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과 역사 바로 세우기, 통합의 마지막 메시지, 이념·계파를 뛰어넘는 인사 스타일 등이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이나 리더십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면서다. 김 전 대통령의 공과를 이야기할수록 박 대통령의 과(過)가 도드라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본관의 세종실 앞 복도에 걸려 있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 왼쪽부터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

김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이들은 고인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가장 많이 입에 올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 발전과 자유·인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도 주목받고 있다. 친일잔재 청산,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성격 규정,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세력 처벌 등 일련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재임 중 최고 치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1954년 여당인 자유당 후보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된 YS는 할아버지뻘인 이승만 대통령(당시 79세)에게 “국부로 남으셔야 한다”며 3선 개헌에 반대했다. 국회가 ‘사사오입(반올림)’이란 변칙으로 이미 부결된 개헌안을 다시 통과시키자 YS는 자유당을 탈당해 야당 정치인 인생을 시작했다.
 

민주당 구파에 속했던 YS는 4·19 혁명 후 윤보선 대통령 당선으로 잠시 여당 생활을 했지만 4개월 만에 신민당 창당으로 다시 야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5개월 만인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체제가 3년간 이어지면서 야인 생활을 했다. 창당 작업 중인 공화당의 영입 제의를 거부한 YS는 이후 박 대통령 집권이 끝나는 1979년 10·26까지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1974년 최연소 야당 총재에 이어 1979년 다시 신민당 총재가 됐을 때는 유신정권이 말기적 징후를 보일 때였다.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과 미국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빌미로 헌정사상 초유의 의원직 제명을 당한 YS로 인해 부마항쟁 불길이 타올랐고 박정희 정권 18년의 철권통치도 막을 내렸다.

1980년 ‘서울의 봄’이라 불렸지만 ‘춘래불사춘’이었던 시기를 잠시 맡은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 YS는 “헛된 욕심과 좁은 시야에 갇혀 민주화를 지연시켰다”고 회고록에서 평가했다. 국민적 여망인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어영부영하며 사장시킨 데 대한 책망이었다.

엄혹했던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 YS는 1983년 목숨을 걸고 23일간 단식투쟁을 했다. 언론에서는 ‘모 재야 인사의 식사 문제’라는 식의 보도밖에 할 수 없었지만 민주투사의 존재를 알았던 국민들은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 과실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YS도 결국 야합이라는 비난 속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로 1990년 노 대통령과 손을 잡았다.

중학생 때부터 꿈꿨던 대통령에 당선된 YS는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형(1심)에 처하는 등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했다.

YS는 비자금 수사 중단 등 비교적 공평한 선거 관리로 ‘영원한 라이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바탕을 깔았다.

50년간 협력하고 경쟁하며 한국 민주주의를 만든 두 사람의 관계는 YS 말대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한 관계”였다.

YS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부산 지역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1992년 14대 총선에서 현대건설 회장 이명박을 영입해 정계에 데뷔시켰고, 그들은 차례로 대통령을 지냈다.

 

2006년 야당 대표로 지방선거 선거운동 도중 커터칼 피습을 당한 박근혜 대통령이 입원한 병원을 YS가 직접 찾는 등 두 사람 사이에 잠깐 화해 기류가 흐르기도 했지만, YS와 박 대통령은 2대째 불편한 관계다. 선대의 악연 외에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 지지, 차남 현철씨 공천 배제, “칠푼이” 발언 등이 불화의 원인이 됐다.

이 같은 평가는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와 인권 가치가 훼손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역사 후퇴’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을 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인사 스타일도 재조명되고 있다. 고인은 다른 사람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반대 의견도 수용하는 유연성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야당 대표와 10차례 단독회담을 갖기도 했고, 공약 파기나 대형 참사 등에 대해 국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만사’라는 신조 아래 폭넓게 인재를 발탁했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아예 ‘불통 정부’라는 낙인이 찍힌 상황이다. 반대 의견을 설득하고 대화하기보다 국정과제라는 명목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가 하면, 반대 의견을 아예 ‘비애국’으로 몰아치는 편 가르기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인사의 경우도 집권 후반부로 갈수록 ‘코드’나 충성심을 중시하고, 특정 지역 편향이 도드라지고 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 24일 TBS라디오에서 “박 대통령께서도 (김 전 대통령처럼) 좀 그렇게 개방된 자세라고 할까, 마음을 열어놓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 훨씬 국정을 수행하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소통 없는 독단’ 리더십은 갈수록 심화하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24일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노동구조 개편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비난하면서 테러집단인 ‘이슬람국가(IS)’에 비유했다. 국회를 향해서도 ‘위선’ ‘립서비스’ 등 날선 비난 발언을 쏟아냈다. 국민·국회를 향해 대결정치를 선언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양김’ 이후 우리 사회가 그들의 리더십을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정치 리더십은 후퇴해온 단면을 확인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국정 난맥상, 대통령이 국민 분열에 앞장서는 모습 등 박근혜 정부의 퇴행적 측면에 국민들이 시달리다보니 개혁·소통 등 YS 리더십이 재조명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