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림병 천연두를 호환마마(虎患)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귀신처럼 사람을 쓸어가던 재앙을 조선 사람들은 산신령님 호랑이에 비유했다. 자연에 절대적 포식자가 없던 일본인들이 귀신, 도깨비를 만들어 이를 두려워하던 것과 달리, 조선에는 살아 움직이는 재앙이 있었다.
 
엔도 기미오의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 따르면 1917~1918년을 제외하고 1915년부터 1924년까지 8년 동안 연평균 13.8명의 조선인이 호랑이와 표범의 공격에 사망 혹은 부상당했다. 이 기간 사살된 호랑이가 89마리, 표범이 521마리에 달한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조상들은 일제 못잖게 호랑이의 공포에 떨었다.
 
물론 지금으로써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오늘날 한반도 수림에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는 없다. 표범도 멸종했다. 그러나 우리는 왜 호랑이가 멸종했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역사의 공백을 메워줄 책 <정호기>(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 이항·엔도 기미오·이은옥·김동진 해제, 에이도스 펴냄)가 나왔다. 이 책은 1917년 11월 10일부터 같은 해 12월 10일까지 8개 조로 이뤄진 25명의 사냥꾼 편대 '정호군(征虎軍)'을 이끌고 한반도의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한 일본인 기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사냥 원정 기록이다. 영화 <대호> 제작진은 이 책에서 큰 모티프를 얻었다.
 
다다사부로 원정대가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렸다고 말하기란 민망하다. 이들이 포획한 호랑이는 단 두 마리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 그리고 책 앞부분 과학자들이 쓴 해제와 다다사부로의 호랑이 사냥 사실을 국내에 처음 알려준 엔도 기미오의 글을 통해 독자는 당시 조선인들이 왜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는지, 왜 일제의 기업가가 조선 호랑이 사냥에 나섰는지, 당시 일제는 이 사냥대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유추할 근거를 얻을 수 있다.
 
정호군은 원산에 집결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원산으로 이동하는 길에서 이들은 '정호군가'를 불렀다. 가사 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긴 육백삼십 리, 바다로 길로 꿈을 넘어서 / 조선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가자 야마모토 정호군 / 군을 나누어 8분대로, 전사가 되어라 / 조선 반도 산속 깊이, 나아가자 야마모토 정호군 / (…) / 일어서라 총잡이여 사냥해라 몰이꾼들, 일본 남자의 투지를 / 보여라 사냥감으로 뒤덮일 그날까지, 쏘아라 야마모토 정호군.
 
가사에서 우리는 군국주의에 물들었던 당시 일제의 분위기와 더불어, 일제가 조선 호랑이 사냥을 조선 정벌의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호랑이는 첫 식민지 조선을 상징하는 영물이었고, 따라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조선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다. 호랑이 사냥은 일제의 식민지 점령 기념 축제의 성격도 가졌던 셈이다.
 
책은 기록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책에는 당시 원정대를 찍은 사진 여럿이 찍혀 있어, 일제 강점기 당시 한반도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원정대의 복장, 총기류 상태 등도 모두 제대로 고증되어 있다. 영화 <대호> 제작진에게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정호기>(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 이항·엔도 기미오·이은옥·김동진 해제, 에이도스 펴냄). ⓒ에이도스

사진을 보면 다다사부로는 실제 사냥에 나서기에는 너무 몸집이 비대하다. 도시의 자본가답게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조선의 사냥꾼과 대비된다. 멋지게 기른 콧수염 역시 빠른 속도로 서양을 쫓아가던 일제 자본가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제국의 영토를 넓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사냥을 일삼던 서양 자본가들의 모습을 그도 곧바로 흉내 낸 것이다. 실제 그는 <정호기> 본문에서 자신의 원정대를 이집트를 지나가는 부대에 비유한다.
 
다다사부로는 원정대를 조직하고 사냥꾼을 따라다니기만 했을 뿐, 호랑이를 사냥한 자들은 일본인 3명이 포함된 전문 사냥꾼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표범을 사냥하다 얼굴을 물려 크게 다치기도 했다. 사진을 보면 아직 앳된 청년인 몰이꾼의 부은 얼굴이 보인다.
 
이 기간 조선 호랑이의 진짜 천적은 일제 헌병대와 삼림을 마구잡이로 베어 제국의 군대 강화에 활용한 일제 자본가들이었다. 정호군으로 상징되는 일제의 맹수 사냥을 마냥 나쁘게만 보는 것 역시 지금 안전한 시대에 사는 우리의 시각일지도 모른다. 호랑이가 얼마나 골치였던지, 조선 시대부터 나라는 정기적으로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워낙 민간인 피해가 컸다.
 
이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한반도 호랑이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원정 기록으로서 가치 있다. 나아가 아직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유일하게 국립자연사박물관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의 생태 기록 체계가 과거를 통해 본받아야 할 점을 알려주기도 한다. 해제에서 학자들은 다다사부로 원정대가 박제한,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남은 한반도 호랑이의 표본에서 DNA를 검출해 한반도 호랑이 복원의 실마리를 알아보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이야기를 넘어 이 책이 더 많은 이야깃거리의 장을 만들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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