뻗대는 北… 美 압박에 맞불 ‘협상력 높이기’

북한이 다시 ‘벼랑 끝 전술’을 들고 나왔다. 북한은 16일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 10시간 전에 돌연 취소한 데 이어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을 내세워 미국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북·미 정상회담도 무산될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면서도 남북, 북·미 대화를 완전히 끊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내비쳤다. 북·미 정상회담 사전 조율이 여의치 않자 남한과 미국을 격렬히 비난하며 협상력을 올리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북한은 남북 고위급 회담을 걷어찬 명분으로 한·미 연합 공군훈련인 ‘맥스 선더’와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국회 기자회견을 들었다. 북한 측 논리에 따르면 맥스 선더는 남한과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태 전 공사 회견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겨냥한 ‘최고존엄 모독’에 해당한다. 다만 북한이 그동안 남북관계 복원 흐름에 맞춰 대남 비난을 자제해온 점을 미뤄보면 이면에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우선 북한의 ‘남한 길들이기’ 측면이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3월 우리 측 대북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에서 군사적 긴장 완화를 약속한 이후에도 F-22 스텔스 전투기 등 미군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들어오자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태 전 공사의 경우, 김 위원장의 개인사와 성격을 언급한 게 북한 당국을 자극했을 수 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은 짚고 넘어갈 건 짚겠다, 불만도 얘기하겠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포석이기도 하다. 미국이 존 볼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내세워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으로 압박하자 북·미 대화의 판이 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북한 비핵화보다도 미국의 대북 체제보장이 우선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대북 경제재건 협력 발언도 북한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을 수 있다. 북한에 개혁·개방과 체제 전환을 압박하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북, 북·미, 북·중 대화가 열린 이후에도 내부적으로는 ‘자력자강’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김준형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는 “북한이 보기에 미국이 해도 너무하니까 제동을 거는 것 같다. 다만 판을 깨겠다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북한 내부적으로 정책적 혼선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북한 부처들 간 이견 이 막판까지 좁혀지지 않아 회담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 고위급 회담에서는 남북관계 전반과 철도 복원, 체육 교류, 산림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무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 측은 통일부,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 산림청, 북측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철도성, 체육성, 민족경제협력위원회 관계자가 회담에 나오기로 했었다.

북한이 우리와 합의한 일정을 일방적으로 깬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북한은 지난 1월 20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 전 북한 예술단의 남한 공연 준비를 위해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등 사전점검단을 파견한다고 했다가 전날 밤늦게 취소를 통보했다. 북한은 우리 언론의 보도 행태를 트집 잡아 2월 초로 예정됐던 금강산 남북 합동문화공연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키기도 했다.

황당한 美… “北 취소 위협 예상” “여전히 희망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정상회담을 취소할 수 있다는 북한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회담 개최에 희망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북한이 실제로 판을 깨면 ‘최대의 압박’ 카드를 계속 사용하겠다고 경고했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16일(현지시간) 폭스뉴스에 출연해 “우리는 여전히 회담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이 일이 힘든 협상이 될 것으로 보고 준비해 왔다”며 “회담을 취소할 수 있다는 북한의 위협은 우리가 전적으로 예상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샌더스는 “만약 그들(북한)이 만나길 원한다면 우리는 준비가 돼 있을 것이고 그들이 회담을 철회한다면 그래도 좋다(It’s Okay)”며 회담이 열리지 않을 경우 북한에 최고 수위의 제재를 계속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악관은 일단 북한의 엄포가 판을 깨는 것이라기보다는 협상용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방부는 조선중앙통신 보도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문 발표를 접한 뒤 잇따라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북한의 발언 의도가 정상회담을 취소하기보다 비핵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신경전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정상회담 취소나 연기를 통보하기 전에는 예정대로 회담을 추진할 것이라는 방침도 분명히 했다.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은 북한으로부터 어떤 공식적인 통보도 받은 바가 없다며 “다음 달로 예정된 정상회담을 계획대로 진척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의회와 전문가들은 북·미 회담의 성과가 불투명해졌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미 상원 외교위원회 동아태소위 민주당 간사인 에드워드 마키 의원은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과의 협상을 조심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미끼에 걸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만 공화당의 랜드 폴 상원의원은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전개하지 않는 게 미국의 선의를 보여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북한이 미국의 허를 찔렀다”면서 “북한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번 일이 싱가포르 회담 무산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도로 위의 요철 같은 ‘작은 마찰’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로이터통신은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테스트해 보려는 목적인 것 같다”고 전했다.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 선임연구원은 “북한도 트럼프 대통령처럼 협상이 마음에 안 들면 회담장을 박차고 나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겠다는 잠재적 표지를 깔아놓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이 싱가포르 회담을 취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북한 내부에 강온파 간 대립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북한 군부 내 강경파가 갑작스러운 비핵화 대화에 불안해하면서 현재의 외교적 교섭을 방해하려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당황한 靑… “北·美에 무슨 일?” 진의 파악 분주

청와대는 북한의 기습적인 남북 고위급 회담 무기 연기 통보에 하루 종일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국가정보원과 통일부 채널을 비롯해 공식·비공식 라인을 총동원해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청와대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내세운 명분인 한·미 맥스선더 훈련 외에 북·미 협상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청와대는 16일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명의로 공식 입장을 내고 북한의 회담 연기 통보에 대해 “지금의 상황은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진통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이날 0시30분 북한의 회담 무기 연기 통보 이후 국정원과 통일부, 국방부 등 관련 부처를 동원해 진상 파악에 나섰다.

국가안보실은 오전 8시에 열린 현안점검회의에서 맥스선더 훈련 관련 내용과 북한의 동향을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오전 9시부터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참모진 회의가 진행됐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일단 북한 발표의 정확한 뜻과 의미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부에선 신중론이 우세하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가 표면에 나서면 판을 그르칠 수 있다는 우려다. 현안점검회의에서도 “신중히 대처하자”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청와대는 남북 정상 간 핫라인 통화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긴밀히 대처해야겠지만 북·미 정상회담과 한반도 비핵화에 큰 지장을 줄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미국 백악관과도 관련 정보를 교환했다.

청와대는 북한의 불만이 단순히 한·미 연합 군사훈련 탓이라고는 보지 않고 있다. 북·미 양국은 정상회담을 약 한 달 앞두고 막바지 협상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돌발 악재가 발생했거나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사안이 있을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을 명분으로 삼은 것은 북·미 양국 협상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중재를 원하는 ‘SOS’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북한이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목한 것은 미국의 전방위적인 비핵화 압박이 결국 체제 붕괴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당분간 북·미 교섭 상황을 면밀히 살피다 필요할 경우 협상에 개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북·미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문 대통령이 오는 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직접 설득할 가능성도 있다. 북·미 간 협상이 부침을 겪으면서 남북 간 현안 논의는 후순위로 밀릴 전망이다. 남북 고위급 회담도 한동안 개최가 어려울 가능성이 커졌다.

청와대는 17일 오전 7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고 남북 고위급 회담 연기 등 현안에 대해 논의한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리는 NSC 상임위는 그동안 매주 목요일 오후에 개최됐다. 17일 회의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국회 일정 등에 맞춰 시간이 조정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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