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그리스인 조르바》(그리스어 원제: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이다. 1946년에 처음 출간했으며, 우리나라에는 1980년에 이윤기의 번역본이 나왔다.

1889년, 그가 출생했을 당시 크레타는 터키(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인 미할리스와 함께 이라클리오 시내 한복판에서 터키에 저항하다가 공개처형된 그리스인들의 시체를 목격한다.

본문 중,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있는 것은 어린시절 목격한 작가의 경험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대목이다.

반쯤은 무아지경으로 도취된 듯, 반쯤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인간의 창조에 관한 엄청난 이야기를 엮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 잘 들어요, 두목. 어느 날 아침, 하느님은 기분이 울적해 가지고 일어났어요.

그러고는 중얼거리지요. ‘나도 참 한심한 하느님이야!

내겐 향불을 피워 줄 놈 하나, 심심풀이로나마 내 이름을 불러 줄 놈 하나 없으니!

늙은 부엉이처럼 혼자 사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퉤!’

이 양반은 손바닥에다 침을 탁 뱉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안경을 찾아 쓴 다음, 흙 한 덩어리를 집어 침을 퉤퉤 뱉어 이기고 개어 조그만 사내 하나를 만들고 이걸 벽에다 말렸어요.

이레 뒤에 하느님은 이걸 볕에서 거두어들였지요. 잘 말랐더랍니다.

하느님은 이걸 들여다보다 말고 그만 배를 쥐고 웃기 시작했지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랬답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의 솜씨. 이건 꼭 뒷다리로 선 돼지 꼴이잖아!

내가 만들려던 건 이런 게 아닌데. 다른 걸 만들 때는 실수 같은 걸 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은 이 물건의 목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면서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면서 소리쳤지요.

‘꺼져, 썩 꺼져 버려! 지금부터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조그만 돼지 새끼를 잔뜩 까는 것이야.이 땅은 네 것이다.

뛰어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구보……!’ 하지만, 두목도 아시겠지만 그건 돼지가 아니었어요.

펠트 모자를 턱하니 쓰고 웃옷은 어깨에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줄을 잔뜩 세운 바지 차림에 빨간 술이 달린 터키 슬리퍼를 신고 있었어요.

그리고 허리띠에는 ‘내 너를 잡겠노라’이런 글귀가 새겨진 뾰족한 단검(이걸 준 것은 틀림없이 악마일 거예요)까지 차고 있었지요.

그게 사내였어요. 하느님이 사내에게 키스하라고 손을 척 내밀자 사내는 수염을 배배 꼬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이봐요, 영감, 비켜 줘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

본격적인 이야기는 젊은 지식인인 "나"가 친구의 따끔한 충고(박해받는 그리스인 동지들을 돕기 위해 카프카스를 떠나면서 남긴)를

계기로 단 몇 개월 만이라도 책을 치워버리고 잠시 중단되었던 갈탄광 채굴을 다시 시작할 결심으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면서 시작된다.

배경은 1930년대, 동 트기 직전의 항구도시 피레에프스의 한 카페에서... 수프를 곧잘 만들며, 과거 광산노동자 십장 경험을 가졌으며, 산투르 연주까지 섭렵했다는 60대 노인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다.

화자인 내가 바라보는 조르바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여실히 투영된다.

'그는 겁에 질린 불쌍한 인간들이 마음 놓고 편히 살고자 세워놓은 윤리, 종교, 조국과 같은 장애물을 단번에 깨뜨려 무너뜨릴 웃음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나는 그가 불가리아 반군에 대해서, 갈탄에 대해서, 여자들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조국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격정에 사로잡혀 더 이상 말만으로 성이 차지 않으면, 그는 벌떡 일어나 바닷가의 굵은 자갈밭 위에서 춤을 추곤 했다.

그는 시시포스의 바위 굴리기같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우리 삶을 받아들이고 즐기며, 동시에 묵묵히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사자처럼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심지어 어린아이처럼 매 순간 경탄하고 즐기는 사람이었다.

조국, 관습,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따라 주저 없이 행동하며, 하느님과 악마에게도 당당히 맞서는 조르바.

나는 많은 순간, 최고의 미친 짓을, 삶의 본질을 “행하라”라고 소리치는 내 영혼을 꼭 붙잡고 그렇게 하지 못한 내 삶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조르바 앞에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조르바의 놀라운 자연스러움과 젊은 화자인 내가 적용하는, 보다 합리적이고 절제된 “고대 그리스”식 사고방식 사이의 철학적 논쟁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카잔차키스는 수도자들이 은둔하는 아토스산에 올라갔다가 고행하는 수도자들을 보고 되려 믿음에 대한 환멸을 경험했다고 하며, 발칸전쟁 당시엔 마케도니아에 종군했던 경험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결국 조르바의 인생경험은 어느 정도 카잔자키스의 그것과 공유된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막바지에서 갈탄광산이 망하고 '나'가 상심해있을 때 조르바는 '나'에게 음식과 술을 권하고, '나'는 그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둘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 부분은 어쩌면 소설의 결산이며, 전부라고도 볼 수 있다.

자유의지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소유라는 것도 본디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무엇을 소유하면서 태어나진 않았으니까 그저 집착이 있을 뿐..

자신이 만들어낸 집착에 사로잡힌 상태. 바로 그것이 인간의 소유가 아닐까.

카잔차키스의 자유의지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무위자연과도 같은.. 즉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닌 내 자유의지에 의한 자연의 상태.....

다음 대화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말 속에 뼈가 있는 어록들이다.

한 번씩 읽어보시길...

"검지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검지가 자꾸 걸리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버렸어요."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번 아니 3천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것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두목, 산다는 게 뭔지 알아요?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만드는 게 바로 삶이지요.

산다는 게 곧 말썽이에요.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본문에 게시된 컷들은 1964년 개봉된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 앤소니 퀸 주연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장면들이며, 소설의 분위기를 가장 완벽하게 살린 조르바라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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