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파머 톰슨나종일 역,창작과비평사, 2000<영국노동계급의 형성 (상)>

[뉴스프리존= 김현태 기자] 읽기 쉽지 않은 학술서적이고, 출간된 지 50년이 넘은 지나간 시대의 책이지만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이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파머 톰슨(Edward Palmer Thompson, 1924-1993)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역사학자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전사한 공산주의자 형을 따라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고 공산당원이 되었지만, 1956년 헝가리의 민주적 사회주의 시도에 대한 소련의 강경진압에 반대해 당을 탈당해 첫 번째 신좌파(new left) 중 한 명이 되었다. 30대 초반인 1955년에 19세기 말을 살았던 낭만적 사회주의자이자 화가, 공예가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사상을 다룬 『윌리엄 모리스』를 출간했고, 뒤이어 역사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영국노동계급의 형성』(1963)을 세상에 내놓은 뛰어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70년대 초 대학의 상업화를 비판하면서 재직하고 있던 워릭대학(University of Warwick)의 교수직을 내던져 버린 뜨거운 피를 가진 활동가였다.(개인적으로 이 대목이 가장 통쾌하다. 이 통쾌함의 이면은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부끄러움과 좌절감이지만.) 인류절멸의 공포 속에 핵 폐기를 주장했던 평화운동(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의 열렬한 참가자이자 열정적인 논쟁가이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논쟁가였는지는 지금도 유튜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두 번 읽었다. 처음은 책이 번역 출간 된 1999년, 대학원 세미나에서였다. 톰슨은 지배자들의 생각으로 서술된 역사를 거부했다. 상ㆍ하권 합쳐 1,2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그가 생명을 불어 넣은 “가난한 양말 제조공, 러다이트 운동에 가담한 전모공, 시대에 뒤떨어진 수직공, 유토피아적 장인”의 목소리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물론 수없이 등장하는 영국의 지명과 인명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요구되는 것까지 부정하며 재미를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역사학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이 부담감은 문법에 맞지 않는 당시 노동자들의 문건을 사투리로 번역하는 친절함까지 갖춘 유려한 번역에 의해 완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된 것은 2002년 석사논문을 쓰던 때였다. 논문의 주제가 1960-70년대 분출한 새로운 사회운동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어서, 톰슨이 매우 중요한 이론적 자원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800쪽 가량의 펭귄 출판사본과 대결해야 했다. 영어실력이 형편없었던 나에게는 벅찬 일이었지만 그 시대를 공유했던 학과 선생님들의 증언과 공감이 언어적 장벽을 넘어 짜릿함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고립된 소수의 연구자들이 아니라 커다란 학파를 형성하고 동시대에 적용되는 큰 맥락을 읽을 수 있었다. 역사학이 도서관과 개인연구실을 박차고 나와 ‘지금, 여기’와 소통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민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역사의 한 가운데 세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사는 민중의 문화에 주목하게 했다. 무지하고 수동적이며, 감정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규정된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살아갈 문화적 세계가 역사학의 주요 관심이 된 것이다. 톰슨을 통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살아갈 일상은 고립된 원자들의 보잘 것 없는 생존의 몸부림이 아닌 역사를 만들어가는 집합적 주체의 무대가 된다. 영화 <군도>의 대사가 생각난다.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요!” 21세기를 사는 우리라고 다를까? 민주주의와 인권이 상식이 된 우리 시대 민중의 문화를 통해 흩어져 착취당하고, 무시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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