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에서 분단을 소재로 한 첩보영화의 전통은 꽤 오래다. 이 장르의 기원은 한국전쟁 직후에 제작된 <운명의 손>(1954)이다. 국군 방첩대 장교와 북한 여간첩의 로맨스를 서브플롯으로 전개되는 이 반공첩보영화의 서사 구조는 냉전반공시대의 한복판에서 만들어진 <죽은 자와 산 자>(1966)나 탈냉전 시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 <쉬리>(1999)에서도 발견된다. 남한의 첩보원이나 정보장교가 나오고 북한의 여간첩(<운명의 손>, <쉬리>), 혹은 좌익에서 전향하여 남한의 간첩 노릇을 하는 여성(<죽은 자와 산자>)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미모의 여간첩들은 어김없이 남한 첩보원의 남성적 매력에 이끌리고, 이념을 초월한 순애보적인 사랑은 비정하고 냉혹한 분단현실에서 흡사 치정 멜로드라마처럼 예외 없이 여간첩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지난 10년 사이에 제작된 <의형제>(2009)나 <공조>(2016)가 보여주듯 이제 남남북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와 비극적 운명은 남남북남의 브로맨스(?)로 변형된 듯하다. 브로맨스라고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공작>(2018) 역시 이러한 흐름에 일조한다. 적어도 정보기관이 정권안보의 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일말의 양심을 가진 남측 공작원 박석영/‘흑금성’(황정민)과 기아에 허덕이는 인민을 위해 개혁·개방이 필수적이라고 여기는 북측 고위간부 리명운(이성민)이 체제를 넘어서는 인간적 공감을 보여주니 말이다.

남북한, 총성 없는 비즈니스 전쟁

영화 <공작>은 1990년대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대북공작 활동을 했던 박채서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북사업가로 위장하여, 당시 북한의 ‘최고 존엄’ 김정일 국방위원장까지 만나고 왔다는 점에서 흑금성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가장 성공적인 공작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2010년 이명박 정권 때, 박채서는 노무현 정권 당시 한미군사훈련 계획을 북한 공작원에 넘겨줬다는 혐의로 국가보안법 상 실형 6년을 선고받아 2016년 만기 출소했다. 우리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2005년 남한 가수 이효리와 북한 무용수 조명애의 애니콜 휴대폰 CF도 박채서가 관여한‘작품’이라고 하니 영화화 할 소재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싶을 정도다.

1993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특별핵사찰을 요구한 것에 반발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다. 남한의 안기부는 정보사령부 소령 출신 박석영을 중국에서 활동하는 대북사업가로 위장시켜 북한 고위층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안기부의 목적은 단순 명확하다. 박석영이 북한 측의 신뢰를 얻어 북한을 쉽게 오가게 하고 사업을 확장해 나가면서 북한 핵시설까지 정탐하게 하는 것이다. 박석영에게 명령을 내리는 안기부 해외실장 최학성(조진웅)과 안기부장(김응수), 그리고 대통령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첩보공작이다. 박석영은 북측 간부 리명운과 리명운의 사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인민군 장교 정무택(주지훈)과 줄다리기하며 대북사업으로 위장한 북한 침투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간다.

“실제 공작원은 액션 히어로가 아니라 협상가, 연기자에 가깝다”는 윤종빈 감독의 말처럼 <공작>은 총성 없는 말의 전쟁터를 다룬다. 미국의 <미션 임파서블 Mission: Impossible> 시리즈나 <본 Bourne> 시리즈, 한국의 <베를린>(2012), <용의자>(2013)처럼 액션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총 한 발 쏘지 않는 이 첩보영화의 매력은 호쾌한 액션이 아니라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적이자 파트너이기도 한 북한과의 관계를 긴장감 있게 다룬 데 있다. 북한을 다루는 대부분의 남한영화는 북한을 극악무도한 적으로 그리거나(냉전시대의 반공영화), 함께 공존 공생해야 하는 민족의 파트너로 묘사하는(탈냉전시대의 분단영화) 것이었다. 때로 총부리를 겨눴던 적이 형제처럼 되거나(<의형제>(2010)), 반대로 형제처럼 지내다가 불현듯 냉혹한 분단의 현실을 자각이라도 하듯 다시 적이 되는(<공동경비구역 JSA>(2000)) 상황이 변주와 반복을 거듭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공작>은 적도 친구도 아닌 사업상의 파트너쉽으로 남북한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실제 남북한 관계의 본질이다.

사업의 기본은 남이 원하는 것을 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다. <공작>에서 자금난에 허덕이는 북한에 돈과 사업의 루트를 뚫어주고 영변 핵시설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과정은, 그래서 대북관계가 기존 영화처럼 증오나 우정이 아니라 일종의 비즈니스임을 인식하게 한다. 물론, 이 영화가 <팅커 테일 러 솔 저 스 파 이 Tinker Tailor Soldier Spy>(2011)처럼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우아하지만 서늘한 첩보영화는 아니다. 민족감정이 유별난 한국(영화)에서 그런 설정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래서 <공작>은 <의형제>나 <공조>같은 노골적인 우정이 아니라 박석영과 리명운의 인간적 공감을 부각시킨다. 리명운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줄 알면서도 박석영의 탈출을 돕는 장면은 비현실적인 줄 알면서도 용인해 줄 수밖에 없다.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이효리·조명애 CF 촬영장에서 서로에게 선물한 롤렉스 시계와 넥타이핀을 멀리서 확인하는 장면 역시 지나친 감상주의지만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한국영화의 흠이겠지만, 그것이 한국영화의 문화적 코드이기도 하다.

민간사업 교류의 기원, 안보장사의 종말

영화의 재미가 작품 내적인 측면과 질적 우수성에만 있지 않듯이 <공작>이 담고 있는 시대적 배경으로 눈을 돌려보면 영화는 더 흥미롭다. 2005년의 에필로그 장면만 빼면 이 영화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5년간의 시기를 담고 있다. 정확하게 문민정부, 즉 김영삼 정부의 집권 시기다. 영화에서 김정일(기주봉)이 캐릭터로 직접 등장하는 데 반해, 김영삼은 실명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다음 대통령인 김대중은 서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 1995년 정계 복귀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1997년 대선 승리 등 굵직굵직한 정치사가 나열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96년 4·11 총선 직전 여당인 신한국당이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 이른바‘총풍’사건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적당한 안보 분위기를 이용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이다. 남북한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잘 보여주는 이 사건은 권력유지를 위해‘안보장사’를 이어 온 수구세력의 추악한 면모를 드러낸다. 사실, 김영삼 정권은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고 자부하는 문민정부였지만 대북정책면에서 노태우 정권보다도 더 강경한 반북기조였다. 북한의 핵개발, 1994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질 뻔했다가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일어난 조문정국과 주사파 파동, 북한 측의 ‘서울 불바다 발언’, 나중에 밝혀졌지만 미국 클린턴 정부의 북한 폭격 계획 등은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작>이 그러한 신냉전 시대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김대중 정부 이후의 ‘햇볕정책’을 예견하게 만드는 설정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의 광고촬영을 위해 탐방하는 금강산 장면은 훗날 금강산 관광을 떠올리게 한다. 남북합작 CF는 1990년대엔 성사되지 못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2005년 성사됐다. 영변 핵시설 가까이에 있는 장마당 장면의 비참함은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을 연상케 하는데, 이렇듯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대북지원을 기조로 하는 햇볕정책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대통령이 될 뻔했던 김영삼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정책의 기조가 뭐냐고 묻는 말에 “돈 좀 쥐어주면 될 거 아이가?”라고 했다는 일화를 상기해 보면 김영삼의 1990년대는 김대중·노무현의 2000년대를 배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의 평화 무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공작>의 개봉 시기를 안타까워하는 의견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그런 시각을 의식해서인지 영화의 포스터는 ‘냉전의 1990년대’라며, 이것이 ‘옛날이야기’임을 전제하고 있다). 비록 안기부 공작의 일환으로써 대북사업을 그리고 있지만, 이 영화는 남북 민간사업 교류의 기원이자 이제야말로 수명을 다해가는 수구세력 안보장사의 밑바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동시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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