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서울신문

눈처마
북촌의 골목길을 돌아보러 집을 나섰는데 전철역에서 나오자마자 비가 쏟아진다. 우산이 없어 가까이에 있는 운현궁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길 가던 사람들 몇몇도 그곳으로 들어선다. 낯선 사람들이 처마 밑에 나란히 줄지어 서서 잔뜩 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 비가 직선으로 내리는 바람에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젖지 않는다. 서너 뼘 남짓한 처마 밑이 이렇게 안온한 느낌이 들 줄이야. 바로 앞에 자동차가 쉴 새 없이 질주하는 도심 한복판에서 단지 처마 밑에 서 있을 뿐인데도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신기하다. 잠시 후 비가 그치자 저마다 가던 길을 향해 흩어지는 그들을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도 길을 나선다.

운현궁의 처마만큼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릴 적에 살던 집에도 처마가 있었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면 기와지붕 골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당에 동그란 흔적을 남겼다. 지붕 선을 따라 줄지어 옴폭하게 팬 곳에 빗물이 고이고, 그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마루에 엎드려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고소한 기름내를 풍기며 호박전이나 부추전을 부쳐주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바삭한 부침개를 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비 때문에 나가 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만한 군입거리가 또 있을까.

이슥해지도록 비가 그치지 않으면 골목의 중간쯤에 있는 우리 집 대문 앞에는 종종 연인들이 외등을 피해 들어서기도 하였다. 대문이 길에서 약간 들어와 있고 지붕이 외등을 가려주어 헤어지기 섭섭한 연인들에게는 남의 눈을 피해 사랑을 속삭이기에 알맞은 공간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기에 느지막이 귀가하시는 아버지는 골목 어귀부터 헛기침하며 인기척을 내셨다.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피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담벼락과 마주한 방에 있던 우리는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마음껏 사랑을 나눌 공간을 찾지 못해 고작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애틋하게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던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로 남아있을까?

비가 그친 뒤, 북촌 한옥마을의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처마에 눈길이 닿는다.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햇볕을 적당히 가려주고, 비가 들이치는 것도 막아주지만,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잠시 땀을 식히거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처마 밑에 누가 머물다 가든 개의치 않고, 길을 가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시 그곳에 들렀다 가는 사람들 역시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이 필요하면 언제든 쉬었다 간다. 닫힌 공간이되 열려 있고, 열려 있되 닫힌 공간이 바로 처마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품을 내어주지만 오늘처럼 아늑한 느낌을 주는 처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겨울산행을 할 때 눈처마를 만날까 두려워한다. 강원도의 높은 산은 대체로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급경사이고, 서쪽은 완만한 편이다. 겨울에 북서풍이 불면서 눈보라가 몰아치면 능선에 눈이 쌓이면서 절벽인 동쪽으로 초가지붕 처마처럼 설층雪層이 점점 자라나게 된다. 이것을 눈처마라고 하는데 이걸 모르고 밟게 되면 처마가 무너지면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그 밑의 허공을 알 길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같은 눈처마를 몇 번이나 밟았던가.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의 눈眼이 밝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친했던 사람이 바로 눈처마였던 적도 있었고, 상황이 나를 그리로 떠다민 적도 있었다. 그래도 추락하여 크게 다치지 않고, 용케도 지금까지 살얼음판 같은 인생길을 이만큼이라도 건너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눈처마를 만날 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예기치 못한 비바람을 만날 때, 단단한 담벼락과 튼실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운현궁 그 넉넉한 처마 밑과 같은 곳에 서있고 싶을 뿐이다.

많은 이들이 아파트에 사는 요즈음,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이웃 간의 인심은 사방팔방 돌아보아도 그늘 한 점 막아주지 않는 살벌한 시멘트 담벼락 때문일지도 모른다. 철문을 닫으면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는 요즘 사람들이 흙벽이나 구멍 숭숭 뚫린 벽돌담과 손가락으로도 뚫릴 만큼 얇은 창호지를 바른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처마 밑에서 벌어지는 사연을 짐짓 모른 척 눈감아주던 그 여유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바람이 슬며시 흔들어주면 맑은 소리 내는 풍경 하나 달려있어도 좋고, 겨우내 먹을 시래기가 바스락 소리 내며 말라가는 적당히 그늘진 처마여도 좋다. 때로는 제비가 둥지를 틀기도 하고, 꿀벌이 집을 짓기도 하지만 귀찮다 밀어내지 않고 말없이 품어주는 처마. 비나 바람도 더러 피하고, 아픈 다리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 하나 내 마음속에 마련해두고, 나도 쉬고 너도 쉴 수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