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유명한 시인이자 독서가 백곡(白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
조선의 유명한 학자들은 5살에 사서삼경을 떼었다는 등의 일화가 흔하지만, 김득신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서 10살이 돼서야 글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김치는 서두르지 않았다.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김치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었다.

김치는 그런 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말했다.
‘득신아, 학문의 성취가 늦어도 성공할 수 있다.
읽고 또 읽으면 대문장가가 될 수 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부단히 노력했다.
그 노력은 무려 한 번 읽은 책을 1만 번 이상 반복해서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득신은 선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대를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 살다간 인물이다. 그 시기는 임진왜란과 호란이라는 큰 국난을 거친 데다가 격심한 붕당싸움이 벌어지던 혼란기였다. 그런 시대에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받았으니,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화집으로 <<종남총지(終南叢志>>, 문집으로 <<백곡집(栢谷集)>>이 있다.

81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 제1기는 1604년 출생부터 10대에 이르는 시기이고, 제2기는 1624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면서 시인으로 성장하던 청장년기이다. 이 때는 주로 천안 목천 집을 삶의 근거지로 삼아 절집과 서울 등지를 오가면서 글 공부에만 전념하던 시기이다. 또한 수시로 낙방하는 과거시험에도 불구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시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고통을 노래하였다.

제3기는 과거에 급제한 1662년부터의 노년기이다. 그의 나이 59살인 1662년에 뒤늦게 급제하여 부친의 뜻을 이루자, 바로 괴산 능촌에 취묵당을 짓고 거처를 목천에서 취묵당 옆 초당으로 옮긴 뒤 자연과 벗하면서 살았다. 때로는 벼슬살이를 위해 괴산을 떠났지만, 늘 마음은 취묵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멀리서 바라본 개향산 언덕위 취묵당

그는 ‘우둔했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곡 본인도 인정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17세기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공부 때문이었다. 타고난 천재성이 없음을 안 그는 읽고 또 읽고 쓰고 또 쓰며 인내하고 노력하였다. 한 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한 길만 걸어, 결국 청운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으로서 삶을 마칠 수 있었으니, 그의 일생을 반추해 보고 그의 자취를 찾아보는 일은 의미 있는 탐구가 될 것이다.

특히 <사기> 백이전(伯夷傳)이라는 책은 11만 3천 번을 넘게 읽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전해지고 있으니 그의 노력이 얼마나 굉장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가계와 출생

백곡 김득신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4년(선조 37) 10월 18일 아버지 김치(金緻)와 어머니 사천 목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관향은 안동으로 고려조의 명장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이 14대조이자 중시조이며 제학공파의 10대손이다.

그의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백곡노인(栢谷老人)・백옹(栢甕) 등 여러 가지로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백곡을 주로 사용하였다. 백곡은 할아버지 때부터 세거해온 천안 목천 백전리(栢田里)에서 딴 것이다.

김석의 선대는 경기도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부친인 언묵의 묘소는 시흥이며 그 선대들의 묘소도 거의 경기도 일원이다. 다만 김석의 모친 의성김씨는 괴산읍 수진리에 묘소를 잡았으니 친정동네요 이미 김석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후로 괴산일원은 이 집안의 세거지가 된다.

김득신이 목천과 능촌 두 곳에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 김석(錫, 1495-1534) 이후부터이다. 김석의 선대는 그의 부친을 비롯한 여러 선대의 묘소가 경기도 시흥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경기도 시흥 일대가 가문의 삶터였다. 당시 서울에 살고 있었던 고조부 김석은 학문이 뛰어나 1519년(중종 14)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승이신 조광조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이를 피해 외가집이 있던 충북 괴산군 문법리와 전법리로 옮겨 살면서 정착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백현묘원에 있다.

김석에게는 5갑으로 표현되는 충갑・효갑・우갑・제갑・인갑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충갑(忠甲, 1515-1575)만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인 151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고 나머지 네 아들은 괴산으로 이주한 이후에 태어났다. 이들 5갑의 묘소 역시 첫째 아들인 충갑은 충주시 살미면 무릉동에, 효갑은 경기도 시흥시 소래산에, 우갑은 괴산읍 수진리에, 셋째와 넷째 아들인 제갑과 인갑은 아버지와 같은 괴산읍 능촌리에 있었다. 이들 묘소는 현재 대부분 괴산 능촌리 개향산 백현묘원으로 천봉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김석이 괴산으로 내려와 여러 아들을 둠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괴산 능촌리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에 세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김치와 함께 있는 김득신의 묘소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늦은 나이임에도 58살에 급제해 정선군수,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배우는 이는 재능이 남보다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마라.
나는 어리석었지만, 끝내 이루었다. 부지런해야 한다.
만약 재능이 없거나 넓지 못하면 한 가지에 정진해 한 가지를 이루려고 힘써라.
여러 가지 옮기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보다 낫다.
이 모두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타고난 체격과 지능보다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재능일지도 모르기에 부족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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