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殉國先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먼저 죽은 열사! 그 분들의 이름은 순국선열이다. 조국을 위해 기꺼이 하나뿐인 자신의 삶을 내던진 그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에는 하염없이 부족한 설명형의 명사이다. 

11월 17일은 바로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날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선열의 얼과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순국선열의 날이 11월 17일로 제정된 유래는 1939년 11월 21일에 개최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의에서 지청천, 차이석을 비롯한 6인이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안하였고 의결돼 기념일이 시작됐다. 

▲ 안창호 선생의 수형기록카드. 도산안창호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찍었다.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선택한 것은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자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을사조약이 체결된 망국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학창시절 역사책에서 독립운동의 험난한 여정을 짧게나마 배우고 지나간다. 책에는 미처 담기지 못한 역사의 고통과 이름 없는 숱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음을 올해 내내 전국 현충시설 20여 곳을 돌아보며 피부로 느끼고 배웠다. 

독립운동사는 책으로만 읽어도 너무나 가슴 시린 이야기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상물을 보는 것조차 힘겨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페이지로 조금 더 가깝게 걸어 들어가면 위대한 독립운동가들 뿐 아니라 역사의 페이지에 이름이 남지 않은 숱한 순국선열들의 존재 앞에 폐부를 깊이 찔리고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계신 장인환 의사

올해 현충원을 돌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일제의 신사참배에 대항해 자체 폐교를 했던 순천중학교, 백범김구기념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등 순국선열의 혼이 깃든 전국 현충시설을 여럿 돌아봤다.   

평생 방문했던 현충시설보다 올 한해, 방문한 현충시설이 더 많았다. 얼핏 많은 숫자인 것 같아도 기념비와 조형물을 포함해 전국에 독립운동을 기리는 현충시설 909개, 그 중 겨우 20여 곳을 다녀왔을 뿐이다. 

3월 첫 시작은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한국민족운동사상 의열투쟁의 첫 시작을 알린 장인환 의사의 묘소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였다. 장인환 의사는 일제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통감부의 외교고문 미국인 스티븐스를 분연히 응징했다.

▲온새미로 서약을 통해 현충원에 연고 없이 잠들어 있는 애국선열들을 방문하고 이분들의 뜻을 기리는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

하와이 노동이민자로 살며 적은 임금으로 근근이 생활하였지만, 장인환 의사는 을사늑약의 체결과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등 일제의 갖가지 침략 만행 소식에 크게 분개하며 보국을 위한 의거를 결심했다. 10년의 옥살이 이후 일제의 감시에 실의와 병고 끝에 선생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이후 국립현충원 내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돼 영면해 계신다. 

애국지사의 묘역에서 현재를 만들어낸 살아있는 역사 앞에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결코 박제된 것이 아닌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역사에, 순국선열이란 이름 뒤의 한 인생에 얼마나 눈감고 무지했는지 깊은 회한이 찾아왔다. 

장인환 의사의 분연했던 의지와 고단했던 일생을, 감히 짐작으로 품을 수도 없던 그의 뜻을 가슴에 새기며 조심스레 선생의 묘소에 조촐하게 국화꽃 한 송이를 헌사하고 돌아왔다. 

조금이라도 선열들을 기리고자, 온새미로 서약을 통해 현충원에 연고 없이 잠들어 있는 순국선열의 묘비를 닦고 그 뜻을 기리는 캠페인에 동참했다.

▲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수감 중 먹었던 콩밥과 소금무국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0대의 어린 청년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마주했다. 운동에 참가한 주역들은 잔혹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출옥 후에도 일제 경찰의 엄중한 감시와 차별을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기념관 내 참배실 벽에는 학생독립운동에 참가한 숱한 이들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

▲실향민 이산가족인 박연화 할머니(왼쪽 아래)는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불구가 되는 불행을 겪었을 뿐 아니라, 군인이었던 남편(왼쪽 위)을 6.25전쟁으로 잃고 그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남편은 국가유공자로 선정됐지만 위패만이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았다. 올해 이산가족 취재를 하며 만난 90대 어르신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에 통째로 관통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머니는 독립운동을 했던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두었지만 그 삶은 녹록치 못했다. 아버지는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불구가 되었고 할아버지가 재산을 팔아 아버지의 죽음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 순천 매향중학교.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해 자체 폐교령을 내린 옛 매산학교 건물 매향관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때로 순국선열의 자취는 그저 무심결에 지나쳤던 공원의 기념비에도, 동네의 학교에도 남아 있었다. 결코 ‘무명(無名)’이 아니었으나 역사에는 ‘무명’으로 남은 숱한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감히 역사책의 몇 페이지로만 기억할 수 없음에도 그리했던 과거를 무겁게 반성해 보았다.

▲ 광주공원에 위치한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우리의 오늘은 10대의 청년들이, 평범한 안위를 기꺼이 마다한 독립운동가들이, 숱한 민초들이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우리는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쌓아올린 오늘을 살고 있다. 순국선열들에게 빚진 바로 오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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