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무엇 하는 덴지 모를 이 없다 하지만 기업이 여전히 싸개통 신세인 것을 보노라면 기업 식구들조차 기업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

▲ 박종형 작가

대학에서 경영학원론 강좌의 첫 시간을 시작할 때 내가 제일 먼저 올리는 화두가 <기업이란 무엇인가> 묻는 기업의 정의다. 경영학이란 그 학문의 대상이 기업이므로 달리 표현해 ‘기업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영학원론이 너무 학문상의 원리나 이론인 학리學理에 치우치면 자칫 현학적 색깔의 옷을 입혀 기업에 대한 현실 감각을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경계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내처 기업은 ‘함께 땀 흘려 돈 벌어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자 모인 공동체다’라고 결론적인 정의를 내리고는 과연 그런 가를 깨닫게 가르치는 학문이 경영학원론이라 말한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런 식 표현의 의의意義가 풍기는 평범함 때문인지 아니면 경영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학문적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는 탓인지 반응이 뜨악하다. 사실 그 단문 속에 기업의 현실적 정의가 다 담겨 있는데도 시작은 늘 그렇다.

어원적으로 기업은 12세기 이탈리아 도시들에 등장했던 가족사회 콤파니아(company)를 의미했다. 콤파니아는 ‘빵을 나눠 먹는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시 기업은 모든 걸 함께 이룩해 나누고 책임지는 가족적 동질성과 유대감이 그 근본정신이었다. 문자 그대로 기업을 공존 공영하는 공동체로 여겼다. 

학문적으로 내리는 일반적인 정의는, ‘기업이란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기본적 조식으로 생산의 주체로서 영리를 추구하는 독립적인 생산경제단위이다.’라고 한다. 즉 기업이란 일정한 자본을 투자하여 생산, 판매를 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의 생산단위체라는 것이다.

세상에 여러 가지 공동체가 있지만 기업처럼 인간의 능력을 에너지 삼아 이익이라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 인간의 행복한 삶에 기여하는 데란 없다. 가령 젊은이가 일생을 설계할 때 건강한 시민으로 자리 잡고 살며 ‘멋진 부자 a cool rich’를 꿈꾼다고 한다면 기업 말고 그 이상을 실현시킬 삶의 마당이란 기업뿐이다. 세상에 선망하는 부자들의 부는 거의가 기업에서 번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분명 부를 창조해 내는 창조의 장이고, 부자를 탄생 시키는 산실이며, 부자의 집인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우선되고 훨씬 더 절실하며 중요한 것은 ‘산다’는 명제다. 해서 학생들이 기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소중한 밥줄’이자 ‘처녀 금광’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어느 학생들은 피식 웃는다.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인 게다. ‘밥줄’이란 게 풍기는 그 덤덤한 뉘앙스와 달리  리한테 얼마나 절절하게 의미심장한 가를 신고의 세파에 시달려 보지 못한 저들로서는 실감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기업이라는 자궁에 연결된 생존과 성공의 탯줄은 신비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밥줄’일 뿐이다. 그건 하느님이 생명에 매어 주는 탯줄에 버금가는 ‘삶의 탯줄’로, 인간이면 누구나 생명을 얻어 태어난 후 그것을 끊고 죽을 때까지 예토에 다시 매는 제이의 새로운 생명줄이다. 그게 얼마나 귀하고 강인한 가는 기업에 매여 얽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삶의 탯줄 삼아 살아가는 가를 잠시만 들여다보면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우린 너나할 것 없이 마치 태아가 모체에 맨 탯줄을 생명 줄 삼듯 기업이라는 삶의 어머니에다 생존의 밥줄을 매고 자신을 비롯해 온 식구가 산다. 만일 모태가 허약하거나 병들어 그 밥줄이 부실해지면 거기에 목을 매고 사는 생명은 고된 삶으로 허덕이게 된다. 자신 때문으로든 아니면 여럿이서든 더 차지하느라 다투고 잘못 다투다가 그걸 꼬이게 만들거나 끊게 되면 생존 자체가 단절되는 비극을 부르게 된다.

기업은 단순한 직장이 아닌 보다 높은 차원의 ‘삶의 터전’이다. 그게 개인의 일생과 거기에 연대된 가정한테 어떤 의미인 가는 설명이 필요치 않다. ‘나와 나의 식솔의 삶’이란 게 땡볕에 곤죽이 되도록 품을 팔아서라도 지탱해야 하는 엄숙하고도 절실한 일 일진데, 한 치의 소홀함이나 한 순간의 일탈로 그 삶을 구기고 망가뜨리는 것이야말로 그걸 모독해 역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밥줄을 외경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다룬다는 건 건강한 생활인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일터를 혼란스럽고 황폐 시키는 것이다.

기업이 혼란에 빠지고 병들어 망가지는 것은 밥줄에 대한 외경심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기업을 내 집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건 거짓이다. 밥줄에다 예사로 침을 뱉고 대수롭잖다 함부로 걷어차고서는 자신의 삶을 존중 받을 수 없다. 그런 밥줄 주인들이 모여 일하는 한 기업에 좋은 날이 생길 리 만무하다. 입심만 드셀 뿐 가슴에 애정이 고갈된 사람들이 걸핏하면 기업 타박하고 발길질을 해대며 등 돌리기를 여반장으로 하고서는 기업의 발전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를 기약할 수 없다. 실로 그 모든 순리와 역리의 갈림이란 게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밥줄에 대한 바른 의식과 자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밥줄을 운명의 손으로 잘 다뤄 부자든 위대한 기업가든 성공의 탯줄로 만드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 자유다.

다만 그러하고자 해서 소중한 밥줄을 남의 것까지 함부로 틀어쥐고 제 욕심대로 비틀고 훑어서 부자도 되고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건 아담 스미스가 대적大敵으로 삼았던 ‘비열한 탐욕’일 뿐이다. 어느 지식인이 말했다. “지혜를 얻기 전에 돈을 얻는 자는 돈의 주인노릇을 잠시밖에 못한다.”고.

기업이 단순히 삶을 영위하는 데만이 아니라는데 기업의 차원 높은 존재의의가 있다. 그것은 현세에 행복을 일궈낼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사실이다. 처녀금광이랄 수 있는 그 땅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지 호랑이와 돼지가 싸울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다. 하늘 높이 날고 깊은 바다를 수십만 리 씩 헤엄치는 재능과 기술을 가졌어도 동물한테는 부자 되는 꿈이 없다. 창세기에 모세가 인도한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이 가나안복지였다면 지금의 지구에 존재하는 그것은 기업이랄 수 있다. 부푼 꿈과 각양각색의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기업으로 가는 것은 거기에 누구나 캘 수 있는 금광이 무진장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기회의 땅이기 때문에 일단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주인이다. 얼마나 열심히 땀 흘려 곡괭이질을 하느냐에 따라 어느 사람은 금을 캐서 부자로 성공하고 어느 사람은 부를 일군 공으로 위대한 기업가의 명예를 얻으며, 어느 사람은 자기 분수대로 석복하여 행복한 삶을 누린다. 저들이 협동하여 창출한 부가 쌓일수록 넘쳐흘러 그것을 함께 사는 이웃에게 나눌 때 거기에 행복한 삶과 평화가 실현되고 유지될 것이다.

기업에서 부를 캐는 곡괭이질 소리가 끊임없이 힘차게 들려오지 않으면 견실한 가정이나 평화로운 사회의 유지는 불가능하다 그처럼 기업은 꿈과 부와 보람이 넘치는 기회의 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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