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가난한 사람에게도 천국의 길을 열다.

르네상스기의 풍요와 타락

2024-01-01     김상규 칼럼니스트

15c 이탈리아는 부유했다. 인도, 이집트, 터키 등 동방의 상품이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에 모였다가 프랑스와 독일 등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베네치아 제노바 등 해양도시들이 번창했고 피렌체나 밀라노 등 내륙국가는 염색, 갑옷제조 등으로 부를 축적했다.

 상인 계급이 도시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고, 귀족들에 대한 열등감을 돈 자랑으로 해소했다. 메디치 가문은 예술과 학문 등에 투자해서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공공재에 대한 이들의 투자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부는 타락을 가져왔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사회가 되어갔다. 물욕이 지배하는 사회의 특징이 각자도생이다. 각 도시들은 내부적으로도 싸웠고, 도시들끼리도 전쟁을 했다. 베네치아가 오스만 투르크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피렌체는 이교도들과 협력했다. 성직자들도 물질에 굴복했고 교황선거에 돈이 오고 갔다. 또 그들도 사치와 방종에 찌들게 되었다. 성직을 사고팔았고 애인을 두고 자식을 낳았다. 13살짜리가 추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탈리아에 위기가 오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오스만 투르크는 이탈리아의 해상무역로를 위협했다. 베네치아의 주요 무역기지들이 오스만 투르크로 넘어감으로써, 이탈리아의 무역이 위축되고 있었다. 

한편 100년 전쟁후 강대국으로 떠오른 프랑스,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스페인 등이 호시탐탐 이탈리아를 노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나폴리왕권과 밀라노 왕권을 노렸고, 스페인도 숟가락을 놓으며 이탈리아는 이들의 각축장이 되고 있었다. 

교황들의 타락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자기들의 이익을 꾀하려 했다.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조카의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였다. 더욱이 이탈리아 국가간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야 할 교황이 직접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교황국가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변 도시국가들과 싸운 것이다. 

대표적인 교황이 알렉산드르 6세였다. 대단히 유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가로 집권 2년만에 적자상태였던 재정을 흑자로 바꾸고 형벌을 엄격하게 적용해서 사회기강을 잡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왕 샤를8세가 침략했을 때도 이탈리아를 단결시켜 프랑스군을 쫓아내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하지만 성직자로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뇌물을 써서 교황에 선출되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른 것으로 유명한데, 그 아들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은 체사레 보르자였다. 교황은 이 아들에게 군대를 줘서 단숨에 교황국가를 건설했다. 샤를 8세의 침략 때 폐위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다시는 이런 위기에 몰리지 않도록 군대와 영토를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정치인으로는 뛰어났지만 성직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속세의 무력과 돈으로 자신과 교회를 지키는 것은 십자가를 택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또 이 교황을 보면 얼마 전 작고하신 자승스님이 생각난다. 탁월한 행정력과 정치력으로 분란이 그치지 않던 조교종단을 안정시켰으나 자승스님의 정치적 금전적 권력이 너무 강력해져서 물질의 힘이 불교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철스님 같은 성직자로서의 사표가 되어 신도들의 신앙심을 증장시키지 못했다. 또 율리오 2세 교황은 아들이 없어서인지 교황국가를 지키기 위해 직접 갑옷을 입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모습이 신도들에게는 교회의 타락상으로 비쳤다. 

레오2세의 재정파탄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교황은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였다. 그는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로마로 가져오며 학문과 예술에 엄청난 돈을 지출했다. 라파엘로를 사랑해서 그를 중용했고, 음악에도 많은 돈을 지원했다. 부잣집 아들이라 그런지 파티를 열었다 하면 300명 이상을 초청했고, 사냥을 좋아했는데, 사냥터의 농민들이 레오를 반겼다고 한다. 팁을 많이 줬기 때문에…. 

한편 성베드로 성당을 다시 지어야 했다. 전임 율리오 2세 때 오래된 구성당을 허물어 버려 그 일이 오롯이 레오 10세의 부담이 된 것이다. 설계 단계였지만 석재 등을 마련할 돈을 미리 마련해야 했다. 

게다가 프랑스의 침입을 막고 교황령인 우르비노 공작령을 자기집안이 차지하도록 하기위해 전쟁을 했다. 본인의 씀씀이에다 전쟁이 겹쳐 돈이 기하급수적으로 들어갔다. 교황청의 돈을 다 탕진하다보니, 죽었을 때 양초가 없어 다른 추기경 장례식에 쓰고 남은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면죄부 발부

돈이 쪼달리다보니 성베드로 성당건립을 위해서 면죄부를 발행하기로 했다. 

원래 면죄부는 11C 십자군 전쟁 시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발부했고 그 후에도 성지 순례 등 탁월한 선행을 한 사람에게만 허용했으나 점차 돈만 내면 살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요한 테첼이라는 수도사가 면죄부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동전이 헌금함에 짤랑하며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솟아오른다”는 노래를 유행시켰다. 또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사해준다는 파격적인 세일을 했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인기리에 면죄부가 팔렸다. 이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면죄부 반박문을 게재했다.

교황청의 오판

하지만 교황청은 이를 하찮은 사건으로 치부했다. 도미니크회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간 논쟁으로 봤고, 루터를 주님의 포도밭을 파헤치는 멧돼지이자 라틴어도 서툰 무식한 수도사로 여겼다. 독일인들의 동조와 반발은 이탈리아에 대한 열등감으로 치부했고, 선행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루터의 주장은 면죄부를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선동 교리로 생각했다. 

로마 교황청도 믿음을 중요시 했으나 신의 은총에 대해 선행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깨닫고 나서도 수행이 필요하다는 불교의 頓悟漸修처럼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선행을 통해 신앙이 더 굳건해진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면죄부도 선행의 일환으로 봤다. 이슬람에서도 자선을 4대 의무중 하나로 중요시한다. 그래서 베드로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돈을 기부하는 선행이 왜 문제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행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물질을 중시하게 될 우려가 있다. 불교에서는 보시를 6바라밀의 제일 앞에 내세우면서도 이것이 물질에 경도될 위험성을 경계했다. 그래서 금강경 4구게를 항상 읽고 다른 사람에게 설하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많은 보물로 보시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다고 했다. 정신적인 보시를 더 중요시 한 것이다. 

루터와 로마의 결별

루터는 로마 카톨릭과 교리를 달리 했다. 그는 당시 로마 교회의 문제가 단순히 몇몇 성직자의 잘못만 고치면 치유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외쳤음에도 고쳐지지 않은 것은 근본적인 데에 문제가 있다고 봤다. 특히 선행이나 기부로 천국에 간다는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신과 거래하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로마서의 말처럼 의인은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기 때문에, 믿음이 선행에 앞선다고(以信稱義) 생각했다. 믿음이 굳건하면 선행은 저절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신학으로 돌아감을 의미했다. 성철스님이 말씀하신 頓悟頓修와 같은 이치다. 화엄경에서도 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믿음이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고 훌륭한 선행을 낳는다. 

루터는 로마 교회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당시 성직자들이 교회의 머리를 교황이라 생각했으나 루터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교황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삶의 지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이며, 독립적인 사제 계급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모두가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 설을 주장했다. 사도시절의 소박한 교회로 돌아가야 하며 성직자를 평신도가 선출하고 해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루터는 로마교회는 수리해서 쓸 수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이 아니라 종교혁명이었다. 

루터의 성공요인: 인쇄술과 독일의 소외감 

루터의 성공에는 첫째 인쇄술의 발전이 큰 기여를 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게재한 반박문은 라틴어로 쓰여 있었다. 인쇄업자가 이것을 번역해서 퍼뜨렸는데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또 루터의 각종 설교 등 자료도 곧 바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요즘으로 보면 루터를 홍보해주는 언론의 역할을 인쇄업자들이 한 셈이다. 교황의 타락상도 인쇄술 덕분에 시시각각 중계되고 있었다. 

둘째 종교세로 인한 독일의 소외감이다. 1515년 마리냐노 전투후 프랑스의 성직자 임명권과 교회세를 로마교황이 아니라 프랑스 왕이 가지게 된 사실도 인쇄술의 보급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연히 독일 사람들 사이에 왜 우리는 교회세를 로마에 납부해야하느냐는 불만이 생겼을 것이다. 독일은 여러 제후들로 분열되어 교황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봉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헨리8세가 수장령을 선포한 것도 교회세를 로마에 뺏기지 않고 영국왕이 가져야한다는 민족주의 정신이 한몫했다. 

셋째 이탈리아는 독일인의 눈으로 볼 때는 타락의 온상이었다. 교황들이 처자식이 있고 사치하고 부패했다. 15c, 16c의 교황들은 2명을 빼고는 이탈리아인이었고 독일인은 그 흔한 추기경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대표없이 세금없다는 생각이 독일지식인들에게 생긴 것은 당연했다.  

민중의 지지: 

종교적 민주주의와 돈이 들지 않는 교리가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누구나 직접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만인 사제설과 성직자를 선출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은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특히 루터의 교리는 돈이 들지 않았다.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했으니 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사람도 천국에 가는 길이 열렸고, 쉬운 독일어 성경을 더욱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었다. 독일어 성경이 당시 송아지 한 마리 가격 또는 교사의 두 달치 월급에 해당하였으나 독일 가구의 20%는 루터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루터의 구호는 간명해서 이해하기 쉬웠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은 누구나 이해하고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돈이 들지 않았다. 간난한 사람들에게도 천국의 길이 열렸다.

루터의 결혼관 

한편 루터에게 성직자의 결혼은 개혁의 일환이었다.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신이 창조한 질서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1525년 수녀출신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루터는 이 결혼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교황을 화나게 하고, 천사들을 웃게 하고, 악마들이 울게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루터는 결혼으로 개인적인 불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루터가 한 때 자신이 수도사가 된 것이 신의 뜻이라고 하자 아버지는 아닐 것이라며 “너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10계명을 어겼다”고 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결혼함으로써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다.

성직자의 결혼허용은 많은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츠빙글리도 칼뱅도 결혼했다. 결혼하고서도 자식과 결혼사실을 숨기는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타락한 수도사들이라 여겼다.

루터와 농민 전쟁

루터를 가장 곤욕스럽게 한 것은 농민전쟁이었다. 루터는 급격한 개혁은 적그리스도에게 빌미를 제공한다며 농민전쟁에 반대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루터의 만인제사장 주의를 만민평등으로 이해했고,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신분차별 철폐, 과도한 세금과 소작료 폐지 등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루터를 따르던 토마스뮌처가 앞장섰다. 그는 농민전쟁을 반대하고 영주 편을 드는 루터를 비난했다. 그리고 수도원 수용을 지지한 루터가 영주들과 결탁했다고 비판했다. 뮌처는 농민들을 직접 이끌고 나선 전쟁터에서 죽었다. 너무 조급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루터는 모든 정부는 하느님이 세운 것이므로 정부에 협조할 것을 당부하였다. 종교개혁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마음을 얻게 되면 저절로 사회개혁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농민전쟁에 반대하여 루터의 평판이 저하되었으나, 루터가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름스 심문후 작센 선제후의 보호나 슈말칼덴 동맹 등으로 카톨릭의 공세에 대항했고 카를5세와의 전쟁에서 영주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카를5세를 몰아낸 것도 그들의 힘이었다. 영주들의 지지가 없었으면 종교개혁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터가 전선을 종교로 좁힌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 덕에 종교개혁이 가능해 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가 총칼을 들고 직접 전쟁에 나서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기독교는 불의를 죽음으로서 극복하는 종교가 아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