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교황과 얀후스의 죽음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
후스는 1369년 보헤미아 남쪽 후즈넥이란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부를 잘해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가난해서 공부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성가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조교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돈이 없어 노상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는 빨리 성직자가 되어 좋은 옷과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꾸었다. 가난한 시골소년에게는 성직자가 출세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
1393년 대학을 졸업하고 1398년에 교수가 되었다. 1409년에 총장까지 되었으니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다. 총장 때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옹호하고 이전에 독일인 교수들 중심으로 운영되던 대학을 체코인 중심으로 끌고 갔다. 후스의 민족주의 정신이 반영된 결과라 생각된다.
민족주의의 상징, 베들레헴 교회
얀후스는 학자이기도 했지만, 대단한 설교자였다. 특히 그는 체코어로 설교를 했고,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가 되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베들레헴 채플은 어느 부유한 상인이 기부한 건물이었다. 후스가 테어날 때 쯤 프라하에서 얀 밀리치란 사제가 죽임을 당했는데, 체코어로 설교한 죄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정식 교회에서는 라틴어 외에는 설교할 수 없었다. 체코사람들은 민족의식이 강했다. 신성로마제국내 슬라브족은 보헤미아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민족의식이 싹텄고 언어를 통해 자기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고자, 위험을 무릎쓰고 체코어 설교를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체코어 설교를 위해 베드레헴 체플을 기부한 것 같다. 정식교회가 아니어서 체코어 설교가 가능했고, 체코 정부당국도 엄격하게 따지지 않았던 것 같다. 과거 라틴어 설교는 일반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후스의 체코어 설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모국어 성경과 설교는 영국의 위클리프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얀후스의 개혁 사상은 기본적으로 위클리프 사상이었다. 보헤미아의 공주가 영국으로 시집가고 보헤미아의 젊은이들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가면서, 위클리프의 사상이 체코로 유입되었다. 얀후스의 마음에 들어맞았는지 강력하게 이 내용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사제들의 절대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지 교황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안내자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성만찬시 성직자에게만 주는 포도주를 평신도에게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위클리프도 주장하지 않았던 사안이다. 얀후스는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기 땜에 차별을 참지 못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빵을 나눠주면서 내 몸이라 했고, 포도주를 주면서 내 피라 했으므로 성직자에게 빵과 포도주를 함께 주는 것이 그것이 원칙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신도들이 예수님의 피인 포도주를 흘리는 일들이 발생하자 아예 일반신도들에게는 주지 않게 된 것이다. 행정편의주의 조치였습니다. 예산이 부족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성만찬은 축복과 관련된 것이다. 평신도들은 포도주를 받지 않는 자기들의 축복이 반쪼가리가 된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3천명을 수용하는 베들레헴 채플에서 이런 문제를 의제화한 후스는 명성이 올라갔고 카렐대학교 총장까지 된다.
면죄부 판매 비판과 후스의 고난
그러나 1412년 요한23세 교황이 면제부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후스는 고난을 겪게 된다.
교황이 나폴리를 공격하면서 면죄부를 발행한 것을 후스가 격렬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교황이 로마, 아비뇽, 볼로냐에 3명이나 있던 시기로 나폴리왕은 로마교황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한 23세 교황은 당시 이교도가 아니라 자기 정적을 공격하면서 십자군을 결성하고 면죄부를 발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얀후스는 요한23세가 “면죄부를 판 것”은 가롯 유다의 행위나 다름없고, 빗나간 교황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한다. 당시 면죄부를 비판하며 프라하 젊은이 3명이 사형당하기도 했다. 그동안 베들레헴 교회에서 오랫동안 체코어로 설교한 후 민중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교황의 압력으로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서 고향 근처의 코지흐라덱이라는 시골로 낙향했는데, 사실상 귀양이었다. 낙향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립교황 요한23세는 후스를 파문했다.
교황통합노력과 콘스탄츠 공의회개최
한편 요한23세는 원래 로마교황과 아비뇽교황이 대립하고 있을 때, 로마교황 밑에서 추기경을 하고 있었는데. 1409년에 양 교황의 추기경들은 기존교황을 비판하며 두 교황을 몰아내고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피사공의회를 개최했다. 많은 주교와 신학자, 법률학자, 왕족과 귀족들이 공의회에 참석을 해서 이 반골 추기경들에게 힘을 실어 줬다. 그리하여 공의회에서 기존 교황을 면직하고 새교황 알렉산더 5세를 선출했고 이 교황이 볼로냐에 자리잡자 대부분의 왕들이 지지했다. 그럼에도 로마와 아비뇽 교황은 사임하지 않고 계속 버티기에 들어갔는데, 알렉산더 5세가 1410년에 갑자기 죽게 된다. 그러자 피사공의회측 추기경들은 발다사레 코사란 추기경을 요한23세로 선출한다. 문제는 발다사레코사가 성직자로서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과거에 해적질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고 박사학위와 추기경도 돈으로 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뿐만 아니라 로마의 그레고리우스 12세를 물러나게 하려고 십자군을 결성하고 십자군을 동원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니 얀 후스가 이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타락한 시대였다. 그러니 로마와 아비뇽 교황이 물러날 이유가 없었고, 3명의 교황이 경합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얀후스의 교회개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게 된다. 3명의 교황은 당시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느냐를 보여주는 증거였고, 이런 상황이 공의회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윌리엄오컴, 마르실리오, 파리대 학장 등 많은 학자들이 공의회의 필요성과 공의회가 교황 보다 우위에 선다는 주장을 했다. 3명의 교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권위를 능가하는 힘이 필요했다.
특히 지기스문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강하게 공의회 개최를 요구했고, 요한23세는 두 교황을 몰아낼 생각으로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콘스탄츠 공의회가 개최되었는데, 단일한 교황체제를 만들고 교회개혁을 완수하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공의회에 대한 열망이 컸던 만큼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교황1명, 추기경 29명, 대주교, 사제, 왕족, 귀족 합쳐서 5천명이나 참석을 했다. 성직자나 학자 등 정식참가자 외에 수행원도 엄청나게 참가하는데, 함바식당, 행상뿐 아니라, 창녀 15백명도 돈벌러 왔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 5-1>. 당시 콘스탄츠시는 상주 인구가 6천명 밖에 되지 않았는데, 4년간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요한23세의 도망과 구속
공의회 초기에 요한 23세가 도망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요한 교황의 과거 비행이 논의되고 일부는 탄핵을 제기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3명의 교황이 모두 사임해야 한다며 요한 교황이 스스로 물러나면 탄핵을 취하할 수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요한 교황은 사임하겠다고 약속해놓고 마부로 위장해서 도망을 갔다. 지기스문트와 사이가 나쁜 샤프하우젠 성으로 도망을 가는데 거기서 강박 상태에서 한 약속이라며 사임을 취소했다. 하지만 그는 지기스문트가 보낸 부하들에 의해 체포되어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고 하이델베르그에 구금되었다. 사회를 볼 교황이 궐석이 되자 공의회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때 그레고리우스 12세 교황이 사임 의사를 표현하면서 자신이 공의회를 열고 명예롭게 퇴임하겠다면서 공의회를 구했다. 회의는 계속되어 17년에 마르티누스 5세를 뽑았고 앞으로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한다는 대원칙에 합의하며 폐회했다.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를 생각하면 얀후스의 처단은 교회개혁차원에서 사소한 사건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요한 23세가 자기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만든 사건 같아 보인다. 자기에게 반대한 사제 하나를 손보려는 전형적인 권력자의 술수로도 여겨진다.
얀후스는 지기스문트 황제의 안전 통행권을 믿고 공의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콘스탄츠에 도착하자 말자 3주 만에 구속이 된다. 카톨릭 사제들은 얀후스의 주장이 모두 정통 교리를 위협한다며 철회하라고 윽박질렀다 그럼에도 후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공의회는 후스의 주장을 깊이 생각지 않고 이단으로 처형을 결정했다.
얀후스 화형이 던지는 교훈은 진리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는 화형당했지만 그의 사상은 루터에게 전해져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하나는 당시 성직자들의 좋은게 좋다는 무사안일과 기득권 안주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이단을 처단하기 급급했지 후스나 위클리프가 어떤 사상을 설파했는지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았다.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왜 부당한지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그냥 교황청의 판단이 옳다고 보고 그냥 따라간다는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성만찬에서 과거에는 빵과 포도주를 다 줬다. 평신도에게 빵만 준 것은 일종의 행정 편의주의 였다. 교구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해도 될 사안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았다. 왜 지고의 교황이 결정한 일에 이의를 제기하느냐는 노예 같은 태도만 유지 했다. 그 결과 얀 후스가 화형되어 후스 전쟁과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한나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독일인들이 매일 매일 생각없이 살아가다가 히틀러란 괴물도 만들고 유태인 학살도 한 것이다. 그처럼 콘스탄츠 공의회의 수많은 학자들이나 성직자들도 후스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정치도 마찬가지다. 진영논리에 갇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사실만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진실과 멀어진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 엄청난 위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고 공부해야한다.
우리사회가 빠져있는 진영 는리 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다. 지식인들 까지도 일본에 나쁜 것은 무조건 좋다는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진실을 알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도 공부해야한다. 언론에서 말하는 카더라식 단편 정보에만 의존하지 말고 철저하게 증거에 뒷받침된 책을 읽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