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는 고혈압의 특효약?-

[김경은 한중일 생활이야기] 고구마의 변신은 무죄

2024-02-24     김경은 칼럼니스트

고구마가 고혈압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나왔다. 소금 섭취 제한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 런던의 조지 국제보건연구소(GIGH) 연구 결과다. 매일 큰 고구마 한 개를 먹으면 칼륨 1g을 섭취하면 혈압이 2mmHg이 낮아진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고혈압만이 아니라 뇌졸중과 심장질환 발생 위험도 낮춘다고 발표했다. 

고구마

출출한 겨울밤 간식으로 여겨왔던 고구마가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주목받는 셈이다. 사실 고구마의 ‘의학적 효능’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표적 다이어트 식품으로 꼽혔다. 노화 방지, 암, 당뇨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고구마는 ‘세계의 건강식품’이 됐다. 식품영양 전문가로 구성된 미국 공익과학단체(CSPI)는 고구마를 최고 건강식품 1위로 선정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우주식품으로 지정했다. 일본 후생노동청은 고구마를 ‘준 완전식품’으로 평가했다. 완전식품은 건강상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모두 지닌 단독식품을 말한다. 고구마에는 탄수화물, 비타민C, 토코페롤(비타민E), 베타카로틴, 폴리페놀 등 항산화 성분, 식이섬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고구마는 구황식품이었다. 배고픔을 이겨내는 식물이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상실(橡實·도토리), 송피(松皮·소나무 껍질)와 초식(草食·푸성귀), 갈근(葛根·칡 뿌리) 등으로 기근을 구제할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구황’이라는 표현이 무려 960여 차례 등장한다. 춘궁(春窮)이란 단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백성의 굶주림 해결이 국가의 대사였다. 반대로 고구마의 전래와 보급은 칡뿌리와 소나무 껍질로 연명하던 백성에게 하나의 빛줄기가 됐다.

‘보릿고개’라는 가수 진성의 노래도 있다. 보릿고개란 지난가을 수확한 곡식이 떨어지고 이듬해 곡식은 여물지 않아 배를 곯던 춘궁기를 말한다. ‘아가야 배 꺼질라 뛰지 마라’ ‘주린 배 잡고 물 한 모금’…. 가사가 눈물겹다. 고구마가 헐벗은 조선 백성이 춘궁기를 넘기는 귀중한 양식으로 쓰였을 것이다. 

▶ 조선통신사 조엄, 신의 선물을 도입하다 

그럼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공식적 기록은 영조 39년인 1763년이다. 일본 통신사로 파견된 조엄(趙嚴)에 의해서다. 이 시기는 가뭄이 심했다. 식량난을 덜기 위해 금주령이 내려질 지경이었다. 조엄은 쓰시마 북단 사스나 포구에서 고구마 맛을 보게 됐다. 더욱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작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환호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조엄은 즉시 배를 띄웠다. 고구마 종자를 본국으로 보냈다. 재배법, 보관법을 다룬 서적과 함께. 이듬해 봄 부산 영도에 고구마를 파종했다. 조엄이 남긴 《해사일기》에 나오는 얘기다. 고구마의 시배지인 영도에 ‘조내기 고구마 역사공원(고구마박물관)’이 있다. 조엄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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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감자와 함께 인류를 구한 ‘콜럼버스의 선물’이다. 원산지는 중남미다. 콜럼버스에 의해 스페인에 상륙했다. 곧 전 유럽에 전파됐다. 필리핀을 식민지배하던 스페인은 고구마를 동양에 전파했다. 필리핀을 통해 전파된 고구마는 16세기 후반에 중국을 거쳐 일본에 건너갔다.

고구마가 중국에 전해진 시기는 16C 말이다. 16~17세기는 소빙하기다. 전 세계가 저온현상에 시달렸다. 자연재해가 이어졌다. 농업생산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식량은 부족했다. 중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굶주림의 시대였다. 구세주는 푸젠성(福建省) 출신의 상인인 첸젠롱(陳振龍)이다. 1594년 필리핀 루손섬에서 고구마 종자를 유출했다. 고구마 종자를 배의 밧줄에 숨겼다. 반출을 막던 스페인 관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고향에서 고구마 재배를 시작했다. 생산력이 놀라웠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에 고구마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기아에서 해방됐다. 그 뒤 중국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8C 초 1억5,000만 명이던 인구가 18C 말 3억 명으로 늘었다. 고구마 도입은 ‘중국의 농업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고구마를 대하는 중국인의 태도는 지방마다 차이가 난단다. 남부 지방 사람에게 가난은 추억이 되지 않았다. 고구마는 그저 가난의 상징이었다. 타이완은 달랐다. 전통의 가식이 됐다. 특히 ‘쌀을 먹는 본토인’과 자신을 구별하는 음식으로 여긴다. 

일본 역시 고구마는 구황(救荒) 식물이었다. 그 흔적은 이름에 남아있다. 일본 본토에서는 고구마를 고기마(高貴麻), 쓰시마에서는 ‘고오코오마(孝子麻)’라고 한다. 고오코오마는 고구마로 늙은 부모를 봉양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효’와 ‘고귀’라는 이름에서 당시 고구마의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 고오코오마가 한국으로 건너와 고구마로 변했다. 토속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일종의 귀화어다. 귀화어는 외국어가 한국어 속에 들어온 지 오래되어 외래어 느낌이 사라지고 우리말처럼 쓰이는 말이다.

▶ 고구마와 감자를 혼동한 까닭

우리는 꽤 오랫동안 고구마와 감자를 혼용해서 사용했다. 19세기 청나라로부터 감자가 수입된 후에 고구마를 남감저, 감자를 감저 혹은 북저라고 불렀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는 실제로 고구마를 지칭한 단어였다. 소설 속 주인공 복녀는 ‘가을’에 왕서방네 채소밭에서 감자를 서리하다 들킨다. 소설의 배경은 1920년대 일제 치하다. 당시 감자는 여름에 수확한다. 고구마는 가을에 거뒀다. 당연히 소설에서 ‘서리한 감자’는 고구마인 셈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고구마를 고구마라고 하지 않고 감자라고 한 것일까. 중국 최고의학서 중 하나인 《본초강목》에 고구마를 감저(甘藷)로 표기했다. ‘달콤한 뿌리 작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조선의 중화사상이 발로한 것일까. 고구마 재배법을 다룬 조선의 농서인 《해동농서》, 《종저방》 《감저신보》 등은 모두 고구마를 감저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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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구마와 감자는 유사한 작물인가. 그렇지 않다. 뿌리 식물이라는 게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종이 전혀 다르다. 고구마는 메꽃과 식물이다. 감자는 가짓과 식물이다. 감자는 추운 지역에, 고구마는 더운 지역에서 훨씬 잘 자란다. 그것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데 모양도 비슷하고 뿌리를 먹어서 그런 것이다. 

고구마와 감자를 혼용한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영어권에서도 그랬다. 중남미에서 서양으로 전해졌을 당시 고구마가 POTATO였다. 감자는 WHITE POTATO였다. 이것 열대성 작물인 고구마는 유럽에서 대량생산이 어려웠다. 감자가 18세기 유럽 전역의 주식이 되면서 POTATO로, 고구마가 SWEET POTATO가 바뀌었다. 그것은 아마 ‘감자의 위대성’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감자의 위대성’? 그렇다. 감자는 일명 ‘인류를 구한 생명의 작물’로 불린다. 감자는 특이한 작물이다. 주식이 되고 간식도 된다. 또 음식 재료가 되기도 한다. 사료로도 쓰인다. 공업용 재료가 되기도 한다. 감자처럼 다양한 용도를 갖춘 채소는 없다. 미국 <라이프>지는 10여 년 전에 ‘역사에 끼친 100대 사건’을 중요도에 따라 정리했다. 감자 재배가 39번째로 꼽혔다. 인류사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제2차 세계대전에 못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또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에서는 감자를 목화, 차, 사탕수수, 키니네(말라리아 치료제 원료)와 함께 ‘역사를 바꾼 5대 씨앗’으로 규정했다. 역사의 고비마다 인류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구마의 자색고구마의 효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