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출신 "의좋은 형제 복서 권만득ㆍ권일"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이다.
지난 주말 필자는 김장성 WBC 국제심판위원과 함께 관악구 봉천동에서 KBA(한국 권투협회) 권만득 심판부장을 만났다.
1962년 서울 출신의 김장성 (부천대) 심판은 1세대 심판인 정영수 김진국 김광수 정청운 2세대 심판 김재근 유완수 김병기 문무홍 심판에 이어 장관호 김재훈 김병모 심판 등과 3세대 심판진의 중심축으로 활약하는 심판이다. 풍산체육관에서 마방렬 관장의 문하에서 5년간 복싱을 체계적으로 수학한 김장성 심판은 송파구 강력계 형사로 30년 봉직하다 2년 전 퇴직했다.
복싱가족 권성도 그리고 권만득ㆍ권일 형제
김장성 심판위원은 필자와 같은 강동구에 사는 관계로 가끔씩 체육관에 들려 담화를 나누면 동료심판인 권만득 권일 형제는 우애가 매우 깊은 대표적인 복싱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현재 권만득 심판이 일산에서 운영하는 복싱체육관 명칭도 형제를 뜻하는 브라더(Brother) 복싱체육관이다. WBO 국제심판을 겸직하고 있는 권만득은 1969년 대구광역시 출생의 복싱 집안이다.
부친 권성도 옹은 대구 서부 복싱체육관 오정근 관장 문하에서 복싱을 배워 단 6개월 만에 경북선수권(페더급)을 차지한 원로 복싱인이다. 또한 그의 동생 권일(용인대) 도 1997년 핀란드 템머 복싱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복서 출신의 국제심판이다.
경기장에서 이들 형제를 보면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예산의 실존 인물 이성만 이순 형제의 우애를 다룬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들 형제 이야기는 조선 초 세종 때에 이들이 나눈 형제애가 귀감(龜鑑)이 된다 하여 연산군 3년에 우애비(友愛碑)를 건립하였다.
주된 내용은 가을철 추수가 끝나면 형은 아우의 볏단에 본인의 벼를 가져다 두고 아우는 형의 볏단에 벼를 가져다 두던 중 서로 만난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내용을 함축한 CF가 구봉서 곽규석 콤비가 페러디(Parody) 한 농심라면이다.
1983년 상경한 권만득은 중학교에 입학 제왕적인 김진길 관장이 운영하는 대원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운다.
1940년 경남 합천태생의 김진길 관장은 유명우 김철호 지인진등 3명의 세계챔피언을 탄생시킨 명장중 명장인 지도자다. 해병대 출신인 김 관장의 혹독한 훈련을 소화해낸 권만득은 1984년 당곡중 2학년때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김진호(익수제약)를 꺽고 4강에 진출한다.
김진호는 리라공고 시절 김명복 배 2연패를 동아대 재학시절엔 대학선수권 최우수복서에 선발된 복서였다.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김석현(성사중)과 대결에서 권만득은 치열한 접전 끝에 판정패를 당한다. 복싱 국가대표 김동길(한국체대)의 4촌 동생 김석현은 1991년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제6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복서였다.
권만득의 "국가대표에서 국제 심판까지 가기.."
1986년 당곡고에 입학한 권만득 은 제10회 김명복 박사 배(밴텀급) 에 출전 5연승(4KO)을 거두면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된다. 잔잔했던 복싱판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해 8월 전국체전 선발전에서도 이흥수 사단의 서울체고 에이스 나학균을 판정으로 잡고 기염을 토한다.
나학균은 1985년 서울 월드컵 금메달 김기택(수원대)에 3-2 로 패한 복서였다. 그해 12월 88 서울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엘리트 체육선수들을 선발해 모은 군인체육부대인 상무소속의 이기준을 판정으로 꺽고 또다시 16세 소년 권만득은 연달아 돌풍을 일으킨다.
이기준은 1990년 8월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폴벵키(미국)의 타이틀에 도전 12회 역전 KO패 당한 바로 그 복서다. 1987년 권만득은 쿠바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 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 1회전에서 쿠바의 후안 에르난데스에 판정패를 당한다.
관록이 붙은 권만득은 1987년 88 서울 올림픽 3차 선발전에서도 김범수(경희대)를 2회 RSC로 잡고 결승에 진출한다. 비록 결승에서 차홍선 (동아대)에 3-2로 패했지만 경기력을 인정받아 한국복싱의 미래로 주목을 받았다.
1989년 동국대학(감독 김진영)에 진학한 권만득은 2년간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하지 않는다, 대학 3학년에 진학한 1991년 태국 킹스컵대회에 출전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권만득은 그해 대통령 배 대회에서도 이재현(대전)을 잡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서울시청 김희준을 꺽 고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선수촌에 입촌한다. 그러나 선수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촌한다, 그에겐 올림픽 출전이란 간절함과 열정이 부족 결국 최종선발전에서 전진철(원광대)에 판정패 출전이 좌절되면서 복싱을 접었다.
그리고 동생, 권 일
7살 아래인 그의 동생인 권일 도 형 못지않은 복싱 스킬을 보유한 복서였다. 1991년 어느날 대원체육관 김진길 관장이 스파링 관계로 필자가 근무하는 88체육관을 내방 했다. 그때 당곡중 졸업반인 권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권일의 스파링 파트너는 용산공고 3학년 최요삼. 난 그때 3년 선배 최요삼과 한치의 물러섬 없는 타격전을 펼친 그의 하이테크 (Hightect)한 공격력에 매료되어 주목하면서 지켜봤다. 1990년 당곡중 2학년 때 학생선수권 준우승을 차지한 권일을 필자가 지휘봉을 잡은 용산공고로 스카웃 하겠다는 생각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당곡고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김진길 관장 면전이라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1992년 전국체전 선발전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당곡고에 진학한 권일은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리라공고 박정필과 맞붙었다. 권일은 선전했지만 복싱계 마키아벨리라는 닉 네임으로 복싱판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영향력을 보유한 황철순 사단의 박정필의 견고한 벽을 넘기엔 2%가 부족했다.
그러나 그해 캐나다에서 개최되는 세계청소년대회에 박정필이 대표로 선발되어 전국체전은 당연히 당곡고 신입생 권일이 박정필의 대타로 출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무주공산이 된 플라이급은 서울체고 페더급 선수가 2체급을 감량하면서 입성 권일은 허망하게 돌아선다. 그때부터 그는 복싱에 의욕을 상실 복싱에 매진하지 않는다. 당곡고 3학년에 들어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1992년 캐나다 에드먼턴 청소년대회에 밴텀급 국가대표로 선발된 박상민(경희대)에 2회 RSC승을 거두고 4강에 진출 기염을 토했다.
이후 용인대를 거쳐 상무에 입대한 권일은 이흥수 감독의 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한다. 그리고 1997년 제9회 세계선수권(헝거리) 최종결승에서 박정필에 비록 8-5로 분패 했지만 내용은 초접전이었다.
그리고 그해 핀란드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에(밴텀급) 국가대표로 출전 비록 메달 획득엔 실패 했지만 형제 복서 국가대표로 위용(威容)을 자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권일은 얼마전 상무에서 자신의 복싱 포텐셜(Potential)을 폭팔하게 만든 이흥수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승리의 비결은 자신감이며 자신감은 엄청난 준비 속에 인내의 값을 치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귀중한 면류관임을 자각(自覺)하고 이런 깨우침을 제공한 이흥수 감독에게 겸허하게 보은의 예(禮)를 갖춘 것이다.
권일은 2002년 프로에 전향 4연승을 거두고 2003년 홍효식을 10회 판정으로 잡고 제45대 한국슈퍼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그리고 2004년 라이벌 채승석과 방어전에서 석연찮은 판정패를 당한다,
이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깊은 실망과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 형 권만득은 동생이 더이상 불공정한 판정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곧바로 심판으로 입성했다. 그러나 동생 권일은 얼마후 현역에서 은퇴한다.
그리고 프로복싱 심판으로 위촉되어 형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현재 일산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권만득 심판부장과 신용정보 회사에 근무하는 권일 형제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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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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